[분수대] 훈민정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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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말이 안 통할 때처럼 답답한 경우는 없다. 형편 없는 외국어 실력으로 외국여행을 할 때, 그래도 안타까운 손짓 발짓을 해가며 최소한의 활동은 펼칠 수 있다.

그러나 억울한 경우 호소나 뭔가 속깊은 이야기를 해야할 때의 답답함이라니. 훈민정음이 반포되던 1446년까지 우리 백성 대부분은 그렇게 말문 아닌 '글문' 이 막힌 채 살아왔다.

훈민정음이 나오기 전 지배층인 양반들은 한문을 사용했다. 그리고 중인층인 서리들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린 이두를 사용했다. 백성들은 한문을 배워서도 안되고 너무 어려워 배울 만한 여력도 없었다. 이런 백성들을 위하고 올바로 가르치기 위해 누구나 쉽게 배워 쓸 수 있게 만든 것이 훈민정음이다.

훈민정음은 성대에서 입술에 이르는 구강구조의 모양을 본뜨고 각각의 위치를 등분해 자음과 모음을 만들었다. 때문에 모든 소리를 소리나는 대로 적을 수 있는, 창제자와 일시가 분명한 세계 유일의 과학적 문자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이런 과학성을 십분 활용, 정보화시대 훈민정음의 세계화에도 힘써야겠지만 5백54돌 한글날을 맞아 세종대왕의 창제정신을 되새겼으면 한다.

훈민정음의 소리나 글자 꼴은 음양과 오행의 우주운행 원리, 순리에 형이상학적 기초를 두고 있다.

우주의 모든 현상이 그 원리에 의해 운행되듯 사람의 말소리 또한 그 질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순리에 따르는 언어일 때 비로소 백성을 올바로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훈민정음은 내포하고 있다. 곧 '바른 정치는 바른 소리에서 나온다' 는 언어관에서 훈민정음은 나왔다.

훈민정음 창제의 이런 속뜻을 생각할 때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 오늘 우리의 언어생활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 먼저 바른 소리로 바른 정치를 펴야 할 정치인들의 말이 거칠기 짝이 없다.

'돌대가리' '미친 놈' '지랄한다' '인간 쓰레기 집합소' '정신 없는 나라' 등 입에 담기 힘든, 말문을 터주기는커녕 막는 막말들이 쏟아져 나오니 대치정국은 더욱 가팔라질 수밖에 없다.

이 말들을 담아내느라 신문과 방송언어도 거칠어지고 사회풍속도 험악해지고 있다. 책임 있는 정치인의 공적인 발언도 이와 같을진대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익명의 비방과 욕설은 어떨 것인가. 지도자들부터 바른 말로 돌아가 풍속을 순화하고 국민을 잘 이끌었으면 한다.

이경철 문화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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