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이형기 '우체부 김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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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 도시에는

편지를 쓰는 시민이 아무도 없다

전화를 두고

팩시를 두고

성가시게 편지는 무슨 편지

하지만 우체부 김씨의 우편낭은

산타클로스의 선물푸대보다 더 크다

그 속에 가득 찬

안 사면 손해인 소비자의 복음

홍보용 인쇄물

공짜로 줄 듯한 모델 아가씨의 미소와

모시는 말씀 알리는 말씀

말씀만 쏙 빠지게 다듬어낸 활자들은

마음이 없기에 어떤 마음도 가질 수 없다

마음이 어디 밥 먹여 주는가!

- 이형기(67) '우체부 김씨' 중

빨간 우체통을 보면 가슴이 설레고 우편 배달원의 자전거 벨소리를 기다리던 그런 날은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런가. 한 통의 편지를 몇번이고 곱씹어 읽고 그 행간까지도 파헤치면서 밤을 새워 답장을 쓰던 그런 날들도. 편지쓰기로부터 시에 눈을 뜨고 아름다운 언어를 캐내 끝내 시인의 성좌에서 찬란한 빛을 쏟아내고 있는 노시인은 마음이 담기지 않은 활자들로 배가 부른 요즈음의 우편낭에서 잃어져가는 시를 생각한다.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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