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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 칼럼] 나눠먹기식 분식개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얼마 전 야당이 정부인사의 호남편중을 지적하는 자료를 내면서 55개나 되는 정부산하단체 및 공기업에 호남출신 또는 여당인사가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다는 명단을 발표했다.

여당은 즉각 고위 공직자 40%가 영남출신이란 통계자료를 반증으로 제시하면서 반박했다.

*** 점점 심해지는 人事편중

그러나 최근들어 편중인사는 더욱 심해진 것 같다는 것이 일반적 관측이다.최근 한 정부투자기관의 임원이 그만두게 됐다.

소속기관장이 연임을 제청했으므로 당연히 그렇게 될 줄 알았던 그는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 아무 소식이 없어 퇴직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 며칠 후 호남출신이 그 임원자리에 발탁됐단다.연임될 줄 알고 사후대책조차 전혀 하지 않았던 그는 "이제 대통령 잘 뽑아야 되겠더라" 는 씁쓸한 말을 토했다.

이런 인사편중의 심화현상에 대해 걱정하는 소리들이 없질 않다.이러다가 정말 2년 후 정권이라도 바뀌면 자칫 특정지역 출신은 씨가 마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걱정의 소리도 들리고 여당 내에서조차 호남정권 재창출 불가론이 나돌 정도라고 한다.그런데 바로 그런 비관적 전망이 사태를 더 악화시킨다는 것이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어질지 모르니 좀 무리를 하더라도 어떻게든 한자리 차지해야겠다고 기를 쓴다는 것이고 그러다보니 인사편중 현상이 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낙하산인사가 정부의 권력을 사권화(私權化)하고 이 정부가 내세우는 개혁을 저지하는 자해적(自害的) 결과를 빚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공기업의 장에 임명된 여당출신 인사가 자신이 이 기관에 대한 검찰의 수사를 못하게 막았다고 큰소리를 쳤다는 게 그 단적인 예다.

지역이나 정당으로 맺어진 사적인 관계가 부패에 대한 조사나 구조조정 같은 공적 행위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정부나 공기업의 구조조정이 왜 지지부진한지, 금융기관과 재벌의 구조조정이 왜 더딘지 짐작할 만하다.

우리 경제의 가장 큰 골칫덩이인 대우문제만 해도 그렇다.대우의 부채가 얼마일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할 정도로 그들의 심한 분식회계에 대해서는 이미 시중에서도 소문이 파다했는 데도 유독 정부와 금융당국만 몰랐다는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조기에 정리되지 못한 것은 정부에 들어간 대우출신들, 친대우 여당정치인들이 '대우와 사적으로 얽히고 설킨 정부.여당 인사들이 미루고 또 미루다가 마침내 국가경제 전체를 거덜낼지 모르는 벼랑끝에 이르러서야 겨우 청산절차를 밟았다.손을 떼었기 때문이 아닌가.

선거에서 여당을 도왔다는 이유로 청산돼야 할 기업이 수년간 워크아웃이니 뭐니 하면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고, 부실금융기관이 블랙홀처럼 공적자금을 빨아먹어도 제대로 감독이 이뤄지질 않는 것이다.

구조조정을 요구할 때까지는 개혁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나서는 개혁 피로증세를 이유로 오히려 반개혁 세력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놓고도 포철과 같은 큰 기업에 이른바 지역성분(□)이 좋은 정치인 출신들이 기웃거린다는 소리가 들리는 판이다.이런 식의 개혁이야말로 이름만의 개혁, 분식개혁이 아닐 수 없다.

***개인이 공권력 좌지우지

가장 큰 문제는 이처럼 끼리끼리 나눠먹기를 하다보니 공적인 권력과 사적인 인연들이 얽혀 공권력의 왜곡현상까지 벌어지는 것이다.

한빛은행 부정대출이나 신용보증기금 외압사건은 공권력의 사권화 현상의 극단적인 예가 아닐 수 없다.

청와대의 하명(下命)사항을 조사한다는 경찰특별조사팀이 한낱 금융기관의 간부에 대해 조사를 하고 그 간부의 사표처리를 '협의' 하는 행태는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는 지경이다.

지금 정부가 처한 상황은 대단히 심각하다고 생각한다.그것은 정부가 과연 정직한가 하는 의문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끼리끼리 짜맞추기 하고 의혹을 은폐축소하고 여론을 조작하고 호도한다는 의구심이 팽배해 있다면 정부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기가 어려운 것이다.그러나 진실을 덮으면 그것은 지하에서 자란다는 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정부가 그나마 개혁정책을 추진하려 한다면 그들의 공적인 기능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될만큼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본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선 특검제(特檢制)를 자청해서라도 실시해서 공권력의 신뢰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김영배<논설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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