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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지명의 無로 바라보기] 그늘도 휴식처가 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해 각종 메달을 딴 우리 선수들 모두가 자랑스럽다. 10분의 경기를 위해서도 10년을 닦아야 한다.

오랜 훈련기간의 노고가 무척 고맙다. 특히 금메달을 딴 선수들을 쓰다듬고 업어주면서 받들고 싶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런 주장을 한다. 금.은.동 메달 색깔의 차이로 선수들을 차별대우하지 말고, 메달 획득에 실패한 선수들을 더욱 격려하고 보살피자는 것이다.

출전 선수 모두를 똑같이 환대하자는 말이 참으로 사려깊기는 하지만, 그 발상의 바닥에 이미 차별이 깔려 있다.

메달을 목에 걸고 조명을 받는 쪽은 좋기만 하고, 무관으로 남의 시선을 끌지 못하는 쪽은 괴롭기만 하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 빛이 쬐는 쪽과 그늘 쪽에 똑같이 좋고 나쁜 점이 있다.

추석 뒤에 귀경차량이 모든 도로를 메우고 있을 때에, 한 국회의원이 중요한 나랏일로 비행기 시간에 맞추려고 경찰차를 따라 1㎞ 가량의 도로를 역주행했다.

그로 인해 그 의원은 여론의 호된 질타를 받았고 인터넷에 사과의 글까지 올렸다. 그가 일반인이었다면 자만.방심의 과실이 감춰질 수도 있었고, 어쩌면 경찰이 좋은 일을 한 것처럼 미화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미스코리아 출신의 한 여배우 나체 동작 장면이 카메라에 찍혀 그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려졌고 시중에 널리 유포됐다.

그 여배우는 자기 동포들과 인연을 끊고 외국에서 숨어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녀가 평인이었다면 그토록 처참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명인이 술집에서 싸우거나 음주운전을 했다고 치자. 그의 실수는 즉시 나라 전체에 알려진다. 유명인은 아무 데나 갈 수 없고, 함부로 행동할 수도 없다.

가는 곳마다 끊임없이 사람들 시선의 감시를 받아야 한다. 스타는 자기의 뜻이 아닌 대중의 규정에 의해 스타답게 행동하기를 강요당한다. 피곤하게 살아야 한다.

예선에서 탈락한 우리 선수들이 시드니 거리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보도가 있었다. 죄를 지은 것처럼 미안하기도 하고 좌절과 고독도 느꼈을 것이다.

일찌감치 세상의 높은 절벽을 경험했을 것이다. 우리는 난쟁이 4남매의 삶을 다룬 방송 특집을 본 적이 있다.

남자 셋과 여자 하나가 모두 난쟁이다. 맏형이 딸을 낳았는데 그도 역시 난쟁이다. 난쟁이 아이를 유치원에 입학시키고 난 후, 그 삼촌이 하는 말이 우리의 가슴을 친다. "저 아이가 유치원에서 일찌감치 절망을 이기는 법을 터득했으면 좋겠다" 고.

양지는 따뜻하고 사진 찍기에도 좋다. 얼굴이 밝게 나온다. 그러나 오래 서있으면 너무 뜨겁고 피로해진다.

음지는 사진에는 어둡게 나오지만 시원하고 안정감을 준다. 평화롭게 쉬는데 좋다. 또 밝은 데서 어두운 곳을 볼 수 없으므로 음지에서 세상이 제대로 보인다.

실패의 고통을 맛보는 음지에서 내가 마음먹은 대로만 세상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하게 터득할 수 있다.

메달을 목에 건 우리 선수들에게 보내는 찬탄 속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마치 1백m를 달리는 10초 속에 오랜 기간의 고뇌와 인내가 담겨 있듯이 말이다.

패하고 돌아오는 이들에게는 침묵이 그들을 편하게 하는 최상의 위로다. 그늘을 휴식처로 삼도록 그들의 아픔을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석지명 <법주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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