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잘못된 역사라도 그대로 두어 과거 반성 거울로 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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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8월 중국 베이징(北京)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홍위병들이 정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중국 충칭(重慶)직할시 정부가 홍위병 집단 무덤을 주요 문물(문화재)로 최근 지정했다. 전국에 산재해 있는 이들 묘지 가운데 성(省)·직할시 단위의 문물로 지정된 것은 충칭 무덤이 처음이다. 홍위병은 극좌파 모험주의 노선으로 중국에서 비판받아온 문화대혁명(1966~76) 당시 극단적인 폭력을 일삼았던 조직이다.

중국 지식인들이 즐겨보는 신경보(新京報)는 19일 “잘못된 역사라도 있는 그대로 보존해 후세에게 과거를 반성하는 교육 현장으로 삼자는 취지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번에 문물로 지정된 곳은 531명이 집단으로 매장돼 있는 충칭 사핑(沙坪)공원 내 홍위병 공동묘지다. 홍위병들이 이곳에 대거 묻히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66년 12월 충칭에선 문혁을 일으킨 마오쩌둥(毛澤東)을 지지하는 조반파(造反派)와 보수파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발생했다. 이듬해 조반파는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눠졌다. 두 파벌은 7월 7일 충칭의 훙옌(紅巖)디젤기계공장에서 유혈 충돌했다. 당시 9명이 숨지고 200명이 다쳤다. 우파 지식인을 상대로 한 투쟁을 일컫던 문투(文鬪)가 이때부터 총칼과 탱크까지 동원한 무투(武鬪)로 악화됐다.

아래 왼쪽은 충칭시 사핑공원 내 홍위병 묘원. [중앙포토]

67년 7월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충칭에서 발생한 31차례의 무투에서 14세 소녀를 포함해 645명이 숨졌다. 당시를 기억하는 한 노인은 “37구의 시신을 한꺼번에 묻기도 하고, 공간이 좁아 3층으로 나눠 매장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충칭에는 홍위병 출신의 묘지가 한때 24곳에 달했다. 그러나 홍위병 출신임을 숨기려는 가족들에 의해 몰래 이장됐거나 문혁이 끝난 70년대 이후 피해자들에 의해 대부분 훼손됐다.

이념 대립 때문에 서로 죽고 죽이는 극단적 투쟁의 상처가 깊었기 때문에 충칭시 정부가 홍위병 묘지를 문물로 지정하는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2005년 이 일대를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생기면서 묘지의 처리 방향을 놓고 “죄상을 감안해 묘지를 파헤쳐 버리자”는 주장과 함께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보존하자”는 주장이 5년간 맞섰다.

보존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사핑공원 관계자들은 이때부터 가해자와 피해자를 포함해 2000여 명을 방문하면서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홍위병 100여 명의 생전 활동상과 사망 원인 자료를 확보했다. 20여 명의 역사·건축 전문가가 참석한 토론회에서 “미래를 지향하되 아픈 과거를 잊지 말자”고 입을 모았다. 결국 지난해 12월 15일 충칭시 문물국은 홍위병 묘지를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하고 공식 명칭을 ‘홍위병 묘원(墓園)’으로 결정했다.

충칭시 관계자는 “홍위병 묘지 보존 결정은 ‘역사를 거울로 삼는다(以史爲鑑)’는 정신을 실천한 사례”라 고 말했다.

베이징=장세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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