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가을이 가득 찬 하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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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 첫 구절이 서울 도심 한 호텔 벽에 나붙어 있다. 간판과 광고로 가득찬 빌딩 숲에서 보는 시 한 구절이기에 더욱 값지게 눈에 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 없이 파랗다. 정말 하늘은 휑하니 가을로 가득차 있다.

사계절이 분명한 우리나라에서 가을은 보통 9, 10, 11월 세 달을 가리킨다.

절기상으로는 입추부터 입동 사이를 일컫는다. 그러나 봄과 마찬가지로 가을은 지독한 더위와 추위가 분명히 있는 여름.겨울과 달리 그 사이에 '낀 계절' 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 "봄은 왔지만 봄 같지가 않다" 는 말이 있듯 늦더위와 첫 추위 사이의 가을도 세달 내내 느끼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꽃 만발하고 화창한 5월 한달만 확실하게 봄을 느껴 '계절의 여왕' 으로 불리듯 하늘 맑고 먼산이 이마 앞으로 턱 다가서는10월 한달은 누가 뭐래도 가을이다.

10월에는 한로(寒露)와 상강(霜降)이 들어 있다. 찬 이슬과 흰 서리가 투명한 공간에 맺히고 내린다. 기러기가 날아오고 국화가 한층 노랗게 피어오른다.

곡식을 거둬들이는 충만의 계절이면서도 맑은 하늘에 자꾸만 무언가 비어가는 상실의 계절이다.

정비석이 "가을은 서글픈 계절이다" 고 했듯 한국인의 심성에 가을은 슬프다.

아무 것도 없는 자신의 마음 원래의 자리, 영혼을 곧이곧대로 들여다 보게 하는 계절이 가을이다.

"우리의 영혼은 타자(他者)에 대한 꿈이다" 라고 미국 시인 게리 스나이더는 말했다.

30여년 전부터 캘리포니아 숲에서 '야성의 삶' 을 살고 있는 그는 서울 국제문학포럼 참석차 한국에 와 지금은 경주의 맑은 하늘 아래서 신라 천년의 숨결에 영혼의 문을 열고 있다.

그는 인간이 인간을 넘어 더 큰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모든 타자를 만나러 가는 것이며,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은 자연의 모든 생명체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낀 계절' 이라도 우리는 10월이 있어 가을의 참 모습을 볼 수 있다.

10월이 있어 계절은 여름에서 겨울로 직접 넘어갈 수는 없다는 순리를 보여준다.

계절이 어김없이 돌고 돌듯 나 또한 네가 되고 또 무엇이 되어 돌고 돌리라는 것을 10월의 텅빈 하늘은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무엇 하나 업수이 여길 수 있겠는가. 눈을 들어 가을이 가득찬 10월의 하늘을 바라볼 일이다.

이경철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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