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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럼] 짧았던 겨울의 후유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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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대중 대통령당선자가 가진 첫 내외신 기자회견장. '준비된 대통령' 답게 거침없이 소신을 밝혀나갔다. 딱 한 군데 석연찮은 구석을 빼놓고는.

*** '두 토끼' 노린 DJ노믹스

한 여자 외신기자는 "구조조정과 고용안정문제를 어떻게 함께 풀어갈 것인가" 를 물었다. 개혁을 하자면 실업자가 늘어날 텐데 그런 모순관계를 푸는 해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엉터리 통역 탓인지, 대통령당선자는 어물쩍 넘어갔다. 하긴 통역이 제대로 됐다 해도 어렵고 난처한 질문이었으리라. 아무리 개혁도 좋지만, 당장 늘어나는 실업자 사태를 현실적으로 어찌 감당할 것인가.

하지만 새 정부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데도 경기는 불덩이처럼 달아올랐고, 실업률이 높아지기는커녕 금세 쑥쑥 떨어졌으니 앞서의 외국기자 질문 따위는 공연한 시비였던 셈이다.

金대통령은 노조와의 전쟁을 불사했던 영국의 대처 총리와는 다른 길을 택했다. 대처 총리는 "구조조정에는 실업이 약(藥)" 이라고 믿었지만, 金대통령은 달랐다.

개혁도 중요하지만 대량실업사태 또한 묵과하지 않았다. 구조조정과 취업안정이라는 상충되는 목표를 동시에 추구해 나갔다. 소위 DJ노믹스의 가장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金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업들에 대해서는 엄한 질책을, 노동자들에게는 한없는 애정을 표시했다. 국민에게 경제를 설명하는 자리에서는 소위 온돌방 이론을 폈다.

"경기가 좋아져 아랫목은 따뜻해졌으나 윗목은 아직 차갑다. 조금만 기다리면 윗목도 따뜻해질 테니 기다려 달라" 며 어려운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어떻게해서라도 이 추운 겨울을 빨리 벗어나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이처럼 아무리 절실한 개혁이라도 늘 따뜻한 정치적 배려가 따랐다. 기업들이 경제를 망친 가해자요, 노동자들은 피해자라는 인식이 깊이 깔려 있었다.

반면 대처 총리는 金대통령에 비해 지극히 매정하고 야멸찬 정책을 썼다. 오히려 기업편을 들며 노조를 영국병의 주범으로 몰아세웠다.

아랫목 따뜻하고 윗목 차가운 것은 그녀에겐 당연한 것이었다. 아랫목과 윗목에 차이가 있는 게 원래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이라는 데서 출발했다.

대처의 경제정책은 고지식하기 짝이 없는 겨울정책이었다. 충분히 추워야 영국 국민이 정신을 번쩍 차릴 것이오, 영국병을 일으킨 해충이나 병균들이 말끔히 자연 소탕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겨울은 추워야 하고 그 겨울만 잘 견뎌내면 봄은 저절로 온다고 여겼다. 정치적 타협은 철저히 경계했다.

여기에 비해 DJ노믹스는 여하히 겨울을 빨리 벗어나게 하느냐, 여하히 덜 춥게 하느냐에 치중했다. 코스닥을 불쏘시개 삼아 벤처붐을 일으켰는가 하면, 고용문제가 안풀리면 주저없이 정치적 해법을 동원했다.

그리하여 겨울 탈출작전은 단시일 내에 대성공을 거뒀고, 현 정권의 대표적 치적으로 자리매김됐다. 그야말로 두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것이다.

하지만 그건 애당초 무리요, 착각이었다. 두마리 토끼를 잡았다고 큰소리 쳤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착각이었는지 최근의 경제상황이 단적으로 증명해준다.

그처럼 떠들썩했던 구조조정은 '그것대로 '원점을 맴돌고 있고, 경기는 '경기대로 '속절없이 주저앉고 있으니 말이다.

*** 구조조정을 정치타협하듯

DJ노믹스의 서슬도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결정적 과오는 과욕에서 비롯됐다. 안되는 건 안된다 했어야 했는데, 모든 걸 장담했다가 본전도 못찾게 된 것이다. 그걸 주창했던 인물들이 쫓겨난 것은 물론이고 잘못된 시작은 내내 속을 썩여오고 있다.

잘못 끼워진 대표적인 첫 단추가 노사정(勞使政)위원회 같은 것이다. 원칙을 세우고 실천해 나가야 할 정부가 있는 원칙까지 무너뜨리는 기구를 만들었고, 거기에 초법적인 힘까지 실어줬으니. 더구나 경제논리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곳이 아니었다. 여의도 원내총무들이 정치협상하듯 했다.

결국 지금의 경제 현상은 충분히 예상됐던 일. 살점을 뜯어내는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구조조정을 정치타협의 미봉으로 대응한 당연한 결과다. 포퓰리즘과 구조조정은 상극이라는 사실은 간과했던 탓이다. 어차피 DJ노믹스란 포퓰리즘을 토대한 정치공약 아니었던가.

이장규 <일본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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