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한국의 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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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인간이 개발해낸 격투기 가운데 레슬링의 역사가 가장 깊다는 게 정설이다. 특별한 도구나 장소가 필요 없이 그저 둘이 만나 힘을 겨루는 레슬링이 인류의 '원초적 경기' 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미 5천년 전의 고대 이집트 벽화에 레슬링 경기 장면이 나오며, 이보다 훨씬 앞선 1만5천~2만년 전의 프랑스 동굴벽화에도 레슬링을 묘사한 그림들이 있다.

레슬링은 고대 바빌론이나 중국.인도는 물론 북미의 원주민들에 이르기까지 고대시대 전세계에서 성행했다. 우리의 씨름이나 일본의 스모, 몽골의 부흐, 러시아의 삼보, 스위스의 슈빙겐 등은 각각 나름대로 발전시킨 레슬링의 한 형태라 할 수 있다.

레슬링이 경기의 형태를 갖춘 것은 그리스 시대로 기원전(BC) 708년 제18회 고대 올림픽 때 정식 경기종목으로 채택됐다.

고대 그리스의 가장 유명한 레슬링 선수는 고대 올림픽에서 여섯차례나 우승한 크로톤의 밀로였다. BC 540년의 제60회 올림픽 소년부 레슬링에서 우승한 그는 BC 532년 62회부터 BC 516년 66회 대회까지 5회 연속 우승을 차지한다.

마흔살이 넘어 출전한 67회 대회에서도 상대가 도망다니는 바람에 스스로 '지쳐 '경기를 포기했다. 그가 힘이 얼마나 세고 날렵했던지 건물 지붕이 무너지자 대들보를 떠받쳐 사람들을 구하고 자신도 잽싸게 빠져 나왔다고 한다.

1896년 부활된 근대 올림픽은 고대 올림픽의 전통을 이어 상반신만 공격하는 그레코로만형을 경기종목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부터는 전신을 공격할 수 있는 자유형도 정식종목으로 채택,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1934년 YMCA가 레슬링팀을 창단하면서 처음 보급됐고, 46년 비로소 제1회 전국레슬링대회가 개최됐다.

우리나라 레슬링 역사는 짧지만 레슬링이 한국 스포츠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48년 런던대회 때부터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은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레슬링의 양정모 선수가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첫 금메달을 따냈다. 한국의 두번째 금메달도 84년 LA 올림픽 때 레슬링의 김원기 선수가 땄다.

이번에 다시 심권호 선수가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하며 금메달을 따냈다. 그것도 2체급 그랜드 슬램의 대기록을 사상 최초로 달성하면서 따낸 금메달이라니 더욱 값지다. 적지 않은 나이(28세)에 불굴의 투지를 보여준 그는 '한국의 밀로' 다.

유재식 베를린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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