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본질 피해가는 남북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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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최근 열린 남북회담들이 본질적 문제를 겉돌거나 회피하는 인상을 주는 것은 대단히 유감이다.

회담에 따라서는 이미 문서로 합의한 사항마저 지키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남북은 그제 끝난 2차 적십자회담에서 이산가족 방문단 추가교환과 함께 생사.주소확인 및 서신교환을 각각 수백명 규모로 '시범적으로'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면회소 설치.전면 생사확인은 미뤄졌고, 국군포로.납북자 문제는 합의서에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1차 적십자회담에서 양측은 이산가족면회소를 설치.운영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사항은 비전향장기수 전원 송환 즉시 회담을 열어 협의 확정한다" 고 못박았다.

장기수 송환 후 20일 가량이나 지나 2차 회담이 열린 데다, 그나마 면회소 설치마저 확정하지 못했으니 사실상 합의문을 어긴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측이 김용순(金容淳)북한 노동당 비서의 남한 방문시 합의한 공동보도문을 원용해 '연내에 마치기로 했다' 고 공언한 모든 이산가족의 주소.생사 확인도 이번 적십자회담에서 적어도 '연내' 는 물건너 가버렸다.

정부가 북한 페이스에 끌려다니는 모습을 호도(糊塗)하기 위해 '희망사항' 에 불과한 협상목표를 기정사실인 양 부풀리는 것도 잘못이다.

북한은 상봉의 제도화나 군사적 신뢰조치 같은 본질문제를 회피하고 곁가지만 건드려 이익을 취하려 한다면 이 또한 잘못된 협상자세다.

오늘 제주에서 열리는 남북 국방장관회담만 해도 북측은 회담 의제를 이미 '신의주~서울 사이의 철도 연결과 개성~문산 사이의 도로개설과 관련한 군사적 문제들' 이라고 못박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제기할 군 직통전화 개설, 부대이동.군사훈련 통보, 군사훈련 참관 등 군사적 신뢰조성.긴장완화 방안들이 얼마나 깊이 논의될지 불투명한 상황이다.

만일 북한이 같은 시기에 서울에서 열리는 남북경협 실무접촉에서 대규모 식량지원을 요구하면서 국방장관회담에는 상응한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면 남한 여론은 회담에 싸늘한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다. 남북이 본질문제에 성실히 접근한다는 확인이 없고선 경협회담인들 잘 될 리가 없다.

6.15선언 이후 남북화해의 분위기는 띄울 만큼 띄웠다. 이제는 남북이 차분하게 본질문제를 파고들어 서로에게 진정 이익이 되는 조치들을 강구할 시점이다.

이산가족의 만남을 제도화.정례화하고, 얼어붙은 휴전선을 녹이는 실질적인 군사조치들을 착착 합의.실행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국민도 불안감을 털고 정부를 신뢰하며, 필요하다면 기꺼이 호주머니도 열 것이다. 북한도 본질문제에 부닥치기만 하면 한사코 발뺌하는 듯한 인상에서 속히 탈피해야 옳다. 남북 국방장관회담이 이런 본질적 회담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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