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성장이냐 분배냐를 넘어서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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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학위를 얻고 돌아와 직장을 구할 때였다. 뒷날 총리를 지낸 은사 한 분이 무슨 공부를 했느냐고 물으셨다. 분배론 쪽으로 논문을 썼다고 했더니, 일순 표정이 굳어지더니 이러시는 것 아닌가.

"이력서에는 그렇게 쓰지 말게. "

"…. "

딱히 분배론도 아니고, 굳이 갖다대자면 그쪽이 가장 가까웠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 분배라는 관념은 용공이나 반미에 버금가는 '불온 사상'이었다. 거기서 20년이 흐른 오늘 시대가 크게 변했다. 분배를 외쳐야 개혁 인사가 되고, 성장을 걱정하면 수구 '꼴통'으로 몰리는 세상이 됐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야 어떻든 그런 인식 구도는 잘못이다. 분배와 성장은 개혁과 보수를 나누는 기준이 아니며, 정의와 불의를 가르는 척도는 더더욱 아니다.

이런 사례가 있다. 1930년대 케인스 이론이 케임브리지대학을 중심으로 위세를 떨치자, 런던대학은 오스트리아의 하이에크를 모셔다가 맞불을 놓았다. 케인스는 전래의 생산 대신 '수요 경제학'으로 일대 혁명을 일으켰으며, 하이에크는 분배라는 말만 들어도 혈압이 오르는 인물이다. 하루는 케인스의 수제자 리처드 칸이 하이에크의 강연을 듣고는 "그러니까 당신의 견해로는 내가 새 양복을 한 벌 구입하면 그게 실업을 늘리겠군요"라고 물었단다. 흑판 가득히 숫자와 부호를 그리며 장광설을 토한 끝에 하이에크는 "그렇소" 하더라는 것이다. 케인스라면 단연 "아니오"라고 받았으리라. 하이에크의 강박 관념은 양복 살 돈만큼 당장 '투자 여력'이 줄어든다는 데에 있고, 케인스 역시 양복을 사면 투자가 그만큼-그 돈이 양복 공장으로 되돌아올 때까지-늦춰진다는 사정을 모를 리 없다. 하이에크든 케인스든 양복 소비가 양복 생산을 자극한다는 현실은 거부하지 않을 터이므로, 양복 구입이 실업을 늘리느냐 줄이느냐는 논쟁은 이론을 위한 석학들의 고집일 뿐이다.

이 딱한 일이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다. 분배냐 성장이냐는 신선 놀음에 나라 경제 썩는 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경제가 왜 이렇게 골골하는지는 누구나 다 안다. 이왕의 언행을 미뤄 대통령만 모르는 듯하다. 투자를 않기 때문이다. 왜 투자를 피하는지도 아마 대통령을 빼고는 모두가 알 것이다. 투자 여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투자 의욕이 없기-꺾였기-때문이다. 기업이 장사를 마다하는데 양복 공장을 지으라는 하이에크의 권고가 무슨 소용이고, 가계가 지갑을 닫는 판에 양복 소비를 늘리라는 케인스의 처방을 어디에 쓰랴. 양복 공장 투자가도 양복 소비자도 대통령을 '불안하게' 바라본다면 대통령이 생각을 고쳐야 한다. 경제를 살리는 것이 기업에 특혜와 비리를 묵인하고 차떼기 비자금을 챙기는 것은 아니다. 개혁에 발목이 잡히는 것도 아니고, 부자들의 이기심에 굴복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기업의 모리배(謀利輩) 관행이 과감히 시정되기 바란다. 나는 노동자 복지가 한층 향상되고, 사회의 빈부 격차가 더욱 축소돼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여전히 '분배론자'이며, 그래서 전하고 싶다. 성장을 통해서는 분배의 공정을 도모할 수 있지만, 공평한 분배로는 성장을 기약하지 못한다는 말을. '꼴보수' 주장의 복사판이다! 그러나 분배가 요즘처럼 일품 메뉴가 되기 전에도 나는 분배를 찾다가 찬밥 설움을 톡톡히 받았으니 다소는 분배의 유연성을 당부할 자격이(?) 있다. 물론 성장이 되레 불평등을 심화한 미국이나, 공정한 분배가 필히 성장을 가속시킬 중동 산유국 등 여기도 예외와 허점이 많다.

그렇다면 고른 분배와 함께 '더디 가는' 길이 있다. 역사적 사회주의 국가들이 그러려고 했지만 그것도 옛말이다. 상대적으로 자급적인 폐쇄 경제에서는 가능했으나 지금은 세계화 노도가 늦게 가는 자유마저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지 못하면 몇 걸음 처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대열에서 탈락하고 만다. 이 살벌한 생존 원리 앞에서 지금은 "추한 과거사를 안고 3만 달러 소득으로 가면 뭐하느냐"는 투의 우국 충정 토로나, "참여정부는 구름에 싸인 달이다. 언젠가 구름이 걷히면 그 진가를 알아줄 것"이라는 음풍농월로 소일할 때가 아니다.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