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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관람객 많아 다른 매장 방문은 민폐될 수 있어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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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호 28면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지난 9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쇼(CES)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 이 전 회장,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차녀 이서현 제일모직 전무.

#9일(현지시간) 낮 12시55분
세계 최대의 전자 전시회인 ‘소비자가전쇼(CES) 2010’이 열리는 미국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LVCC) 중앙홀 입구에 금모래색 마이바흐 승용차가 도착했다. 조수석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 운전사 뒷자리에서 이학수 삼성전자 고문이 내린 데 이어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2008년 4월 삼성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처음이다. 검은 재킷, 회색 바지에 붉은 넥타이 차림의 그는 혈색도 좋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지난해 말 사면·복권으로 부담을 던 듯, 여유 있고 유쾌한 분위기였다.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라스베이거스 100분

1시 기자들의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소감을 묻자 “이 쇼(CES)를 하는 이유가 전 세계에서 제일 강한 사람뿐 아니라 거의 다가 모여서 서로 비교·분석해 보라는 취지다. 한국도 기업뿐 아니라 교육·문화 모든 분야에서 항상 국내·세계에서의 자기 위치를 쥐고 가야 앞으로 변화무쌍한 21세기를 견뎌낼 수 있겠다 하는 생각입니다”라고 말했다. 국내 경기 전망은 “그렇게 나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난해 같지는 않을 것”이라고 가볍게 넘겼다. 이어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의 안내를 받아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1시5분 중앙홀 입구에서 삼성전자 전시장까지는 200여m 거리. 전시장 입구를 50m 정도 앞두고 이 전 회장은 문득 두 딸을 찾았다. 평소 가족들과 공식석상에 나선 적이 거의 없는 점을 감안하면 의외였다. 그는 “우리 딸들 광고를 좀 해야겠다”며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 이서현 제일모직 전무를 불러 다정하게 손을 잡고 삼성전자 전시장에 들어섰다. 두 딸이 어머니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을 맞이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자 “어디 갔느냐”며 찾기도 했다.

1시10분 삼성전자 부스에 들어서자 기자들의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부담이 큰 듯했다.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건 아무도 모를 겁니다. 정말 모를 일입니다. 상상하기 힘들고…”라며 말을 아꼈다. 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물론, 국민·정부 다 힘을 합쳐서 한쪽을 보고 열심히 뛰어야죠. 그길밖에 길이 없죠. 없다고 봅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TV·휴대전화 등 전시품을 둘러봤다. 20여 분간 둘러 본 이 전 회장은 회의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1시50분 삼성전자 전시장을 나선 이 전 회장은 중국 하이얼, 일본 파나소닉·샤프를 거쳐 소니 전시장으로 이동했다. 3D TV에 관심이 큰 듯 모든 업체의 입체안경을 써 보기도 했다. 이재용 부사장은 윤부근 사장과 함께 10여m 떨어진 곳에서 아버지를 따랐다. 이 부사장은 “기자와 관람객이 많아서 다른 매장을 둘러보는 것이 민폐가 될 수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니다. 전부 둘러봐야겠다. LG전자까지 가겠다’고 하시더라”고 전했다. 두 딸의 손을 잡은 이 전 회장의 파격과 이 부사장의 독자 행보는 삼성의 3세 경영구도를 확인해주는 상징적인 모습이다. 맏이인 이 부사장은 자신의 몫을 할 만큼 컸다는 해석이 나온다. 앞으로 삼성은 그룹의 핵심인 전자·금융 계열사는 이 부사장이, 호텔신라와 에버랜드 부문은 이부진 전무가, 제일모직과 제일기획은 이서현 전무가 맡을 것으로 전망된다.

2시20분 소니 전시장에 도착한 이 전 회장은 3D TV용 안경을 써본 후 안경다리를 만지며 “안경은 여기가 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전 회장은 삼성전자에 대해서 자신감을 드러냈다. 꼭 3년 전인 2007년 1월 25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전경련 회의에서 그는 “앞으로 20년이 더 걱정”이라며 “중국은 쫓아오고 일본은 앞서가는 상황에서 샌드위치 신세”라는 화두를 던졌다. 그 유명한 ‘샌드위치론’이다. 이번에는 “(삼성)전자가 일본의 큰 전자회사 전체 10개사보다 이익을 더 많이 내고 있다”며 자부심을 보였다.

2시30분 LG전자 전시장을 둘러본 이 전 회장은 도착했던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언제쯤 경영 일선에 복귀하느냐는 질문은 “아직 멀었어요”라고 넘겼다. 하지만 “중국이 쫓아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 “일본 업체가 겁나지 않는다”며 ‘역(逆)샌드위치론’이라 할 만큼의 자신감을 보였다. 다만 10년을 내다본 신수종 사업 준비를 잘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아이고, 턱도 없어. 아직, 아직 멀었어요. 얼마나 긴 세월이라고. 10년 전에 여기 삼성이 지금의 5분의 1 크기에 구멍가게 같았는데, 까딱 잘못하면 그렇게 된다”며 지나친 낙관을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2시37분 자식들이 잘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아직, 아직 배워야죠. 내가 손잡고 다니는 것이 아직 어린애”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사회에 던지고 싶은 화두로 “각 분야가 정신을 좀 차려라”고 말했다. 조금만 구체적인 예를 들어달라고 하자 “나머지는 상상에…”라며 타고 왔던 승용차에 올랐다. 이학수 고문 대신 홍라희 전 관장이 옆자리에 탔다. ‘은둔의 경영자’라는 종전 이미지와는 달리 자상한 남편·아버지의 모습이 돋보였다. 이날은 때마침 이 전 회장의 68번째 생일이었다.

#이틀 전인 7일 오전 9시30분
이 전 회장이 모습을 드러내기 이틀 전, 이재용 부사장이 최고운영책임자(COO)로서 공식 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는 개막을 30분 앞둔 오전 9시30분쯤 삼성전자 전시장 앞에서 미국 디렉TV를 소유하고 있는 리버티 그룹의 총수인 존 멀론 회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채 고개를 끄덕이고 때때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멀론 회장이 자리를 뜨자 이 부사장도 거래처와의 미팅을 위해 라스베이거스의 한 호텔로 떠났다. 30여 분 뒤 전시장으로 돌아온 그는 미국 영화사 드림웍스의 최고경영자(CEO)인 제프리 카젠버그, 미국의 투자회사 크리스털캐피털 대표인 마이클 카힐 등을 잇따라 만났다. 곧이어 디즈니 CEO인 로버트 아이거를 만나 콘텐트 제휴에 대해 논의한 뒤 삼성전자 전시장을 찾은 LG전자 남용 부회장을 영접했다. 거래처와 만나야 한다며 큰 걸음으로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100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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