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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청정 덫에 걸린 세자의 뜨거운 가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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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호 32면

사도세자 영정 사도세자는 반(反) 노론의 정견을 표출하다가 영조와 노론의 합작에 의해 살해되었다. 우승우(한국화가)

절반의 성공 영조⑧ 사도세자(下)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영조는 재위 25년(1749) 2월 16일 창경궁 환경전(歡慶殿)에 나가 ‘오늘은 세자가 처음 정사를 보는 날’이라며 “품의하여 결정할 일이 있으면 세자에게 품의하라. 나는 앉아서 지켜보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사도세자의 정계 데뷔날이었다. 영의정 김재로가 북방의 성진(城津) 방영(防營)을 다시 길주(吉州)에 소속시키자는 함경감사의 청을 아뢰었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도 동의하자 세자는 ‘방영을 다시 길주에 소속시켜도 성진에 군졸이 남아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렇다’는 대답에 “그렇다면 방영을 길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영조가 제동을 걸고 나섰다.

“네 말이 비록 옳지만 당초 방영을 성진으로 옮긴 것은 내가 한 일인데 길주로 다시 옮기는 것은 경솔하지 않느냐? 마땅히 대신에게 먼저 물어보고 또 내게도 품의한 후에 결정하는 것이 옳다.”(『영조실록』 25년 2월 16일)

한중록(恨中錄) 사도세자의 빈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한 많은 삶에 대해 쓴 회고록. 사진가 권태균

국사를 신중하게 처리하라는 주문이었다. 같은 해 4월에는 세자가 대신들에게 “민간의 질고(疾苦)에 대해 물어보았다”는 보고를 듣고는 “좋도다. 질문이여!”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세자가 집권 노론의 당익(黨益)에 손을 대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대리청정 초기 사간원 정언 이윤욱(李允郁)이 과거에 급제한 조진도(趙進道)에 대한 삭과(削科:과거 급제를 취소함)를 요구했다. 그 조부 조덕린(趙德隣)이 노론 대신 김창집 등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귀양을 가는 도중 사망했다는 이유였다. 세자가 삭과를 거부하자 노론은 영조에게 직접 요청해 삭과시켰다. 세자가 노론과 다른 정견을 갖고 있음이 표출된 사건이었다.

성락훈(成樂熏)은 『한국당쟁사』에서 노론 영수 김상로(金尙魯)가 영조에게 ‘동궁이 선왕(경종) 때의 일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갖고 있다’고 보고하자 영조가 불러 꾸짖었는데, 세자가 “황숙(皇叔·경종)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라고 항의하자 못마땅해 했다고 전한다. 영조는 노론 당파성이 강하면서도 공정한 군주인 것처럼 평가받고 싶어했다. 영조는 재위 28년(1752) 경종 4년(1724) 사망한 소론 영수 최석항(崔錫恒)의 관직을 복직시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 부덕한 내가 임어한 지 지금 거의 30년이나 되었는데, 날마다 고심한 것은 조제(調劑:당론 조절) 두 글자였다. 아! 내가 아니었더라면 오늘날 여러 신하들 중에 살아남은 자가 드물 것이다…. 아! 나라의 삼척(三尺:법)은 당인들끼리 보복하라고 만든 것이 아니다. 일시에 보복하면 당인은 비록 통쾌하겠으나 오호라! 보복이란 예부터 돌고 도는 것이니, 법을 만든 자가 도리어 그 법에 걸리지 않을지 어찌 알겠는가?”(『영조실록』28년 11월 2일)

그러나 영조는 재위 31년(1755)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사건을 정치보복의 기회로 이용해 무려 500여 명의 소론 강경파(峻少)를 사형시켰다. 이때 사도세자가 온건론을 주창하면서 위험이 가중되었다. 영조는 경종 때 자신을 보호했던 소론온건파(緩少) 이광좌(李光佐)의 관작까지 삭탈했는데, 이는 살아남을 소론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광좌의 조카인 판중추부사 이종성(李宗城)이 과거 이광좌에 대해 “친척으로 따지면 상복을 입는 관계지만 의리로 따지면 사표(師表)와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 인책할 정도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세자는 ‘경(卿)이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성상과 내가 환히 아는 일인데 이처럼 스스로 자책하는가’라면서 달랬으나 영조는 노론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종성의 관작을 삭탈했다. 이종성은 영조 31년 5월 1일 시민당에서 세자를 만나 “방금 새로 큰 옥사를 겪어 뒷수습을 잘하기가 어려우니 원하건대 저하께서는 대조(大朝:영조)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본받으셔서 끝없는 아름다움을 도모하소서”라고 당부했다.

세자가 두 사건 관련자의 사형을 거부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세자가 위태로워졌다. 세자는 유배된 윤광찬, 전효증, 전효순 등을 국문해 죽이자는 대간의 청을 “따르지 않겠다(不從)”고 거절했고, 당대의 명필 이광사(李匡師)를 죽이자는 청도 거절했다. 두 사건 이듬해인 영조 32년(1756) 1월 관학(館學) 유생 유한사(兪漢師) 등이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의 정려(旌閭)를 요청한 것도 거부했다. 세자의 이런 정견 표출로 노론은 물론 부왕과도 사이가 불편해졌다. 영조는 재위 33년(1757) 11월 8일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와 우의정 신만(申晩)에게, “동궁이 7월 이후로는 진현한 일이 없다”면서 세자를 비난하고 나섰다. 『영조실록』은 이때 김상로가 손으로 땅을 치면서, “신 등은 궐 밖에 있어서 진실로 이런 줄을 몰랐습니다. 신 등이 성상 앞에 있을 때는 말을 가리지 않고 다했으나 동궁에게는 감히 말을 다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통곡했다고 전한다.

사도세자의 문집인 『릉허관만고(凌虛關漫稿)』에는 세자가 지은 ‘스스로 경계하는 사(自警辭)’가 실려 있는데, “기강을 세우니 상벌이 명확하네, 상벌이 명확하니 나라가 다스려지네, 나라가 다스려지니 백성이 편안하네, 대공(大公)이 바르니 사사로움이 없네(紀綱樹兮明賞罰。 賞罰明兮國治 。 治國家兮百姓安。 大公正兮無私)”라는 내용이다. 세자의 대공(大公)과 노론의 당익(黨益)이 충돌했다.

수세에 몰린 세자를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만든 것이 영조의 재혼이었다. 영조는 재위 35년(1759) 5월 정성왕후가 사망한 지 만 2년이 지났는데 영의정 이천보가 계비의 책봉을 청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시킬 정도로 재혼에 집착했다. 영조는 재위 35년(1759) 6월 예순여섯의 나이로 세자보다도 열 살이나 어린 열다섯 정순왕후와 재혼했다. 정순왕후의 부친 김한구(金漢耉)와 아들 김귀주(金龜柱)는 홍봉한처럼 낙방거사였으나 국혼(國婚)을 계기로 벼슬길에 나서 사도세자 제거에 앞장섰다. 혜경궁 홍씨 가문과 정순왕후 가문은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지만 세자 제거에는 뜻을 같이했다.

술을 마시지 않는 세자가 주정뱅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런 소문 속의 세자가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영조 36년(1760)의 온양의 온궁(溫宮) 행차였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전배(前陪)’도 없고 ‘순령수’도 없는 쓸쓸한 행렬이라고 말했지만 호위병력만 도합 520명이었다는 점에서 거짓이었다. 세자는 배 위에서 궁관 이수봉(李壽鳳)과 ‘임금이 배라면 백성은 물이다’라는 설을 강론했고, “길가의 부로(父老)들을 만나 질고를 물어보고 조세와 부역을 감해주라고 명했으므로 일로(一路)가 크게 기뻐했다.”(「어제장헌대왕지문」)

호위 군사의 말이 콩밭을 짓밟자 밭 주인에게 후하게 보상하고 군사를 처벌했다. 세자의 실제 모습은 소문과는 달리 성군의 모습이었다. 그러자 노론의 홍계희(洪啓禧) 등이 영조 38년(1762) 5월 22일 승부수를 던진 것이 나경언(羅景彦)을 시켜 고변한 것이다. 『영조실록』은 나경언에 대해 “사람됨이 불량하고 남을 잘 꾀어냈다”고 전하고 있다. 『어제장헌대왕지문』은 ‘대궐의 하인으로 있던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정조 즉위년(1776) 8월 영남 유생 이응원(李應元)이 “저군(儲君:세자)을 형조에 정소(呈訴:고소)한 것은 천하 만고에 나라와 백성이 있어온 후로는 듣지 못하던 일”이라고 상소한 것처럼 일개 상민(常民)이 대리청정하는 세자를 고변한 희한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형조참의 이해중(李海重)의 보고를 받은 영의정 홍봉한은 “청대(請對)하여 계품하지 않을 수 없다”고 영조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했고, 이해중은 적군이라도 쳐들어온 듯 세 차례나 급히 청대했다. 경기감사 홍계희는 호위(護衛) 강화를 요청해 도성과 대궐의 문을 닫게 했다. 잘 짜인 각본이었다. 사도세자는 고변 이후 매일 시민당 뜰에 거적을 깔고 대죄했으나 장인인 영의정 홍봉한이 이 사실을 영조에게 보고한 것은 대죄 7일째인 5월 29일이었다. 영조는 “나는 그가 대명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답하면서도 늦은 보고를 질책하지도 않았다.

영조는 윤5월 13일 이십일째 대죄하고 있던 세자를 불러 자결을 명했는데 세자궁 관원들의 제지로 실패하자 뒤주 속에 가두었다. 세자는 음력 윤5월 중순의 뙤약볕 아래에서 여드레 동안 신음하다가 죽었지만, 그동안 영조와 노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적으로 생활했다. 세자가 죽은 다음 달 소론 영수 조재호(趙載浩)가 “한쪽 사람들(一邊人:노론)이 모두 소조(小朝:세자)에게 불충하였으나 나는 동궁을 보호하고 있다”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했다. 이 말이야말로 사도세자 사건의 본질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렇게 죽은 사도세자에 대한 확인 사살이 정신병자로 모는 것이었고, 이런 기도는 최근까지도 성공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