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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신인문학상] 소설 당선작 '0시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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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0면

일요일까지는 다시 사흘하고도 세 시간이 남았다. 긴 잠 두 번이면 건너뛸 시간이다. 하지만 잠은 이 방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짧아지고 있다. 토막나버리는 잠이 전부다.

토막토막 끊어지는 잠 속에는 똑같이 끊어지는 꿈과 기억이 있다. 도마 위에서 등분되는 숭어처럼.

냉장고의 문을 열자 가지런히 누워 있는 맥주병들이 보인다. 이 방으로 들어오면서 나는 가급적 술을 마시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 다짐을 곱씹으며 냉수 한 통만 달랑 들어 있는 냉장고에다 사온 맥주를 하나하나 넣었다. 그러나 나는 사흘 동안 냉장고에서 휴식을 취한 맥주를 꺼내 침대 곁으로 옮겨놓는다.

노끈에 묶인 라면상자를 여주인의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옷장에서 그녀의 아들이 가져다놓았을 책을 꺼낸다. 낚시와 나비, 동물에 관한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 책을... 나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반쯤 누운 채 바다를 보며 맥주를 조금씩 마신다.

유리창 너머의 눈발은 사흘간의 금주 뒤에 마시는 맥주 탓인지 무수한 흰나비 떼처럼도 보인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한국의 나비>의 저자는, 나비 관찰을 위해서는 먼저 채집하는 도구를 잘 갖추어야 한다는 지적을 했다. 채집 도구는 의외로 많다. 먼저 포충망이 있다.

그리고 삼각지, 삼각통, 핀셋, 필름통, 허리 주머니, 나침반, 줄자, 구멍을 낸 비닐통, 지도, 테이프, 칼, 가위, 노트. 이 중 인상적인 도구는 당연히 나침반이다. 내 기억 속의 나침반은 전쟁 중에나 필요한 도구였다. 나비를 좇다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철학적인 배려는 전문가다운 기질이 보이는 대목이다.

다음으로 저자는 옷차림에 대해서 언급한다. 간편한 복장이 좋은데, 간혹 나비를 좇느라 넘어지거나 가시에 찔리는 경우에 대비해 등산복을 권한다. 비나, 뱀, 더위를 피하기 위해선 우비, 장화, 모자도 필수품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기록을 권한다. 그때 그때의 날씨, 채집 시간, 채집지 환경, 암컷의 산란 행동, 산란 위치 등등...

일리가 있는 지적이지만 너무 과한 게 아니냐는 생각으로 술잔을 비우고 다음 쪽을 넘기자 그는 한술 더 뜬다. 나비 촬영을 위한 기재들은 다양하기보다 복잡하다.

그 기재들을 이용해 초점을 맞추거나 조리개의 선택, 나비에 접근하는 요령, 렌즈의 선택, 기타 기재를 이용하는 방법,노출 보정, 플래시 사용, 필름 선택...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다음 일은 채집한 나비를 표본 제작하는 요령과 정리 보관에 대한 내용인데 거의 사랑하는 연인을 지극정성으로 배려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족으로 나비와 나방의 차이점을 실었는데 저자는 그 둘의 경계 지점에서 노는 것들을 조심하라는 당부를 마지막으로 글을 마친다. 나는 냉장고에서 꺼낸 세 병의 맥주를 모두 비웠다.

창밖의 눈발은 정말 흰나비 같고 그 너머의 바다색은 네이비블루이거나 코발트블루, 아니면 진북청색이다. 침대로 쓰러져 잠들면서 나는 내가 포충망을 들고 산야를 헤매다가 어디에서 어떤 실수로 나비를 놓친 것일까 생각해 본다. 내게서 떠나가는 나비는 눈발이 날리는 바다 위에서 팔랑거리고 있다. 나는 침대에 결박당한 듯 꼼짝 못하고 나비를 바라볼 뿐이다.

한 달 만에 전화선을 타고 건너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폭포수 아래에서 한 계절 인고의 시간을 견딘 늙은 잉어를 연상시켰다. 나도 덩달아 동안거나 하안거에 들어간 스님의 목소리를 짐작해 흉내내려는 투였다. 상대방이 누구인가를 확인한 우리 두 사람은 잠시 한 달간의 공백을 소거할 침묵을 유지했다. 나는 안국동에서 회기동까지의 밤길을 찬찬히 떠올렸다.

"나, 돌아오는 일요일에 결혼해."

그녀의 목소리는 폭포의 파열음을 유유하게 건너오는 매끄러운 목선(木船) 같았다.

"결혼?"

앉은 채 잠깐 졸다가 어깨죽지에 죽비를 맞는 충격을 처음으로 느꼈지만 나는 이내 몸과 표정을 바로잡았다. 그녀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그녀와 연애를 한 지 삼 년이 조금 지난 어느 날 밤하고도 한 달이 되는 날 오후의 폭설이었다.

"그렇게 빨리?"

"그렇게 됐어."

"뭐 하는 남잔데?"

"내가 가르치는 학생이야."

으음.... 한 사내의 얼굴이 지나간다.

"언젠가 구로에서 봤던 그 사람?"

"아니야, 네가 모르는 사람이야."

"...."

"네가 잘 됐으면 좋겠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잘될 거야. 그건 걱정하지 말아. 근데...그 사람, 나랑 만나고 있을 때 사귀었어?"

폭포수 아래의 잉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물 밑으로 가라앉고 대신 물기둥이 자잘하게 깨어지는 소리가 귓속을 가득 메웠다.

나는 정좌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그녀의 선택에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녀 나이 서른 하나. 지고지순이란 말은 녹슨 족쇄나 다름없다.

흔히들 말하는 사랑이란 감정도 생각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사랑의 집터는 물 속이거나 붓다의 손바닥 위가 될 수 없었다. 그녀는 폭포 소리를 지우고 수면으로 올라왔다.

"그 날 뭐할 거야?"

나는 순간 그녀의 물음의 진의가 무엇인지 헛갈렸다. 그녀의 결혼식에 와 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내 대답은 엉뚱하다고도 할 수 있고 아니면 출가한 지 오래된 수도자의 자기 성찰의 답변 같기도 했다.

"그 방에 가 있을 거야, 아마도... 거기서 잠을 자고 있을 거야."

잠을 깨운 사람은 식사를 가지고 온 여주인이다. 손에는 두툼한 열쇠 꾸러미가 들려 있다. 여주인은, 일어나지 못하고 멍하니 항구 도시의 야경이 담긴 액자에 시선을 매달고 있는 내 모습을 조금 한심하다는 얼굴로 내려다본다.

나도 얼굴을 찡그린다. 허락도 없이 방으로 쳐들어온 여주인의 행동에 대해. 그녀는 즉각 내 심사를 눈치챈 모양이다.

"아무리 두드리고 불러도 대답이 없기에... 총각이 이해하시우. 민박을 오래 하다보니 별의별 손님이 다 있어요. 특히 이런 비수기 때 찾아오는 손님들은 더 신경이 쓰여서."

"아무 일 없을 테니 그만 돌아가세요."

나는 비틀거리며 세면장을 찾았다. 여주인은 세면기에 머리를 담근 내 등에 대고 한 마디 거든다.

"어젠 요 아래 물치 민박집에 투숙했던 젊은 여자가 바다에서 자살했대요. 뱃속에 애까지 있었다고 하니...원 세상에!"

비누거품이 흘러내리는 손을 뻗어 거칠게 문을 닫는다. 아무래도 숭어 낚시를 나가야만 여주인의 의심이 풀릴 듯하다. 나는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고 뜨거운 물로 몸을 적신다.

거울에 들어 있는 한 남자의 나신은 밀려오는 안개로 서서히 지워진다. 안개 위에다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가 지워버린다. 내가 쓰고 지운 글은, 하 하 하...이다.

나는 텅 빈 욕조로 들어가 쪼그리고 앉아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적당한 비율로 혼합해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눈을 감는다. 나는 아직 사랑 때문에 목숨을 버릴 경지에 올라가 있지 않다.

단지 어떤 기억이 있을 뿐이다. 잠을 방해하는 기억. 겨우 잠에 들었다가도 불현듯 가슴을 옥죄어 터지게 만들 것만 같은 기억. 당분간은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못하게 만드는 기억.

길을 걷다 두 다리로 후들거리며 올라와 꼼짝할 수 없게 하는 기억의 공습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할 뿐이다. 기억의 장례식이 가능하다면 손을 내밀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 있으면서 어떻게 기억을 장례시킬 수 있을까. 욕조로 흘러드는 물은 목울대까지 차올랐다가 배수구로 이동한다.

따스한 물 속에 잠긴 내 육체는 기억이라는 유령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일렁이는 검은 숲 사이에서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다. 나는 숲을 들여다본다.

물뱀 한 마리는 도리어 그 기억을 좇아 숲을 빠져나가려고 꿈틀거리는 것 같다. 하지만 물이 넘쳐 흐르는 흰 욕조 안에는 다른 누구도 없다. 물뱀에게 완곡한 말투로 그 사실을 일러주고 싶다. 지난 어느 날의 욕조 속으로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고...

나는 수도꼭지를 잠그고 욕조 바닥의 고무 마개를 연다. 그리고 물살의 소용돌이에 가만히 얼굴을 디민다. 물뱀은 체념한 표정이다.

나는 텅 비어버린 욕조에 물뱀과 함께 쪼그리고 앉아 있다. 물이 빠져나간 구멍 속에서 검은 바람 소리가 올라온다. 검은 구멍을 바라보며 나는 숭어를 떠올리고, 흰나비를 그리고, 그리고 기억에 쫓겨 달아난다는 프롱혼이라는 영양을 동물도감에서 꺼낸다.

그러고보면 민박집의 주인 아들은 이 방에 꽤 많은 물고기와 나비, 짐승들을 풀어놓고 서울로 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여주인의 말대로 서울로 간 것이 아니라 낚싯대나 포충망을 챙겨들고 다른 어느 곳을 쏘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올 누군가를 그곳에서 기다리는 것 같다. 삼 년 전 나는 어떤 흥분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가 놓아둔 네 권의 책을 펼쳐보지 않았다. 삼 년 후 나는 비로소 그 책을 뒤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바람 소리가 올라오는 욕조의 검은 구멍을 들여다본다. 그곳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내 몸은 추위에 떨고 있다. 물뱀은 몸을 잔뜩 오그린 채 불만스런 표정으로 숲을 지킨다. 나는 구멍에 입을 대고 작은 소리로 말한다.

"이봐? ...내 목소리 들려? 나도 그곳으로 가고 싶어."

낚시꾼들은 편광안경을 쓴 채 숭어를 노리고 있고 바다는 코발트블루, 아니면 삭스블루다. 여주인이 가져온 밥을 몇 수저 뜨지 못하고 대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낸다. 하루쯤은 술이라는 것으로 기억에서 도피할 수 있는 법이다.

오십여 미터 앞에다 바다를 두고 육지의 끝자락에 주저앉아 술잔을 비우기. 취했다가 온 몸이 바삭바삭 마르면서 술이 깨기 시작할 때 다시 술을 마시기. 나는 빈 술잔에 술을 따르고 다시 빈 술잔에 술을 따르기를 되풀이한다. 해변을 적시는 파도처럼. 바다에 쌓이지 못하는 눈처럼... 옷장 밑 노끈에 묶인 라면상자는 폐가에 버려진 궤짝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는 빈 술병을 들어 상자를 겨냥하다가 도로 내려놓는다. 술은 제초제와 같이 기억을 태워 없애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느 기억을 '잭의 콩나무'처럼 거대하게 부풀려 감당할 수 없게 만든다. 나는 그 경계에 쪼그리고 앉아 흔들거린다. 바다의 낡은 부표에 앉아 있는 괭이갈매기처럼.

"개 같은 년!"

내 입에서 나온 말의 파장을 되새김질하며 나는 밥상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남은 음식을 하나하나 변기에 쏟아넣는다.

흰 변기에 반쯤 고인 물 속으로 음식들이 풀어지고 서로 섞여 장마철의 개울물로 변해간다. 대지를 흰 빛으로 도배하지 못하고 바다에서 바로 물로 변하는 눈처럼, 식도를 타고 위로 들어가 항문으로 가는 오래된 길을 선택받지 못한 음식은 타원형의 변기 속에서 덜 익은 냄새를 피워 올린다.

나는 그 변기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방금 전의 술마저 토해 올린다. 여주인의 말대로 방파제에 나가 숭어 낚시라도 해야 했다.

손잡이를 돌리자 변기의 오물은 지체없이 한 구멍 속으로 사라지고 언제 소나기가 내렸냐는 듯, 기억 상실증 환자의 얼굴을 한 물을 변기에 담아 놓는다.

나는 수면에 떠서 어른거리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불행히도 변기 속은 기억의 집결지가 아닌 것이다. 배설의 한 장소일 뿐이다. 배설해 버릴 수 있는 기억은 어디에도 없다.

침대에서는 썩어가는 바다 냄새가 난다. 나는 그 위에 눕는다. 액자 속 항구의 야경은 적요하다. 난바다는 눈꺼풀의 움직임에 따라 지워졌다가 나타난다.

가물거리며 사라지는, 형체가 불분명한 그 무엇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철거되고 있다는 스산한 흙먼지 속에서 잠의 구역으로 이동한다. 잠 속의 바다는 조금의 요동조차 없는 두터운 빙판에 덮여 있다. 바다를 건너오는 바람이 그 빙판에서 미끄러진다.

"이 방이야."

새로 이사한 집은 ㄱ자형 한옥인데 넓은 마당을 가지고 있다. 수돗가에 앉아 있던 주인 내외는 내 뒤를 따라오는 그녀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방은 부엌을 통해서 들어가야 한다. 그녀는 아무 말없이 방으로 들어간다. 부엌문의 잠금장치가 허술해서 나는 진땀을 흘린다.

흐린 유리창 너머로 주인 내외가 뭔가 불평을 뱉으며 안을 엿보려 한다. 나는 커튼을 처놓고 방으로 들어가 다시 문을 잠근다. 원피스 차림의 그녀는 바닥에 엎드려 내가 쓴 소설을 읽고 있다. 창문을 잠그고 커튼으로 가린 뒤에야 나는 그녀 곁으로 갈 수 있었다.

긴 냉전 뒤의 햇살 같은 그녀의 방문이다. 방은 보잘것없지만 그녀는 내색을 하지 않는다. 유리창의 가장자리로 들어온 햇살이 책꽂이 위에 길게 누워 있는 오후다.

"이 부분대로 해보고 싶어!"

그녀는 내 소설의 어느 쪽을 가리키며 나를 본다. 읽지 않고서도 나는 그 장면을 기억할 수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 그녀는 원피스 속에 검은 팬티를 입었다. 하지만…나는 알고 있다. 지금의 상황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와 내가 머무는 방은 내 기억에 존재한 적이 없는 방이다. 모든 게 낯설은데도 나는 그녀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나는 내 소설의 내용대로 그녀의 알몸을 뒤에서 부둥켜안은 채 허둥거린다.

"요즘 젊은 것들은 낮밤이 따로 없어!"

나는 소리나는 곳을 본다. 커튼이 마저 가리지 못한 유리창으로 방을 들여다보던 주인 내외가 내뱉은 말이다. 그녀는 화를 내며 이불 속으로 숨는다. 늘 이런 식이다.

꿈이라는 것은. 나는 커튼을 끌어당겨 간신히 유리창을 가리고 그래도 미심쩍어 빈 상자로 막지만 주인 내외의 목소리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들은 계속해서 유리창 밖에서 궁시렁거리며 안을 엿보려고 창문을 흔든다. 그녀는 이불 속에서 얼굴과 팔만 내민 채 다시 소설을 읽는다. 그러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문을 닫아서 잠근 뒤다. 그 문을 열려고 애를 쓰는 나의 모든 노력은 허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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