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앙 신인문학상] 소설 당선작 '0시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9면

<'0시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 김도연

CHECK IN : 그녀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다

삼일 동안 쉬지 않고 내리는 눈[雪]처럼 나는 이 작은 포구의 민박집 이층에서 잠을 자다 깨기를 반복하고 있다. 잠은, 그 속의 꿈은 일그러진 기억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대합실 같다.

그 기억들은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다. 나는 벽에 걸린 액자에 고정된 시선을 힘겹게 옆으로 돌려 통유리 너머의 바다를 본다. 바다의 색깔은 네이비블루에 가깝다.

- 김도연

CHECK IN : 그녀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다

삼일 동안 쉬지 않고 내리는 눈[雪]처럼 나는 이 작은 포구의 민박집 이층에서 잠을 자다 깨기를 반복하고 있다. 잠은, 그 속의 꿈은 일그러진 기억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대합실 같다.

그 기억들은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다. 나는 벽에 걸린 액자에 고정된 시선을 힘겹게 옆으로 돌려 통유리 너머의 바다를 본다. 바다의 색깔은 네이비블루에 가깝다.

흩날리는 눈발이 그 색깔로 동요없이 스며든다. 좀더 눈이 내리면 바다색은 코발트블루로 변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무엇 때문에 바다의 색이 시시로 변하는지 정확히 모른다. 단지 변화를 거듭하는 무수한 결을 담고 있는 바다, 라는 이름밖에는. 그 점에서 바다는 그녀와 닮았다. 그녀와......

포구의 방파제에서는 낚시꾼들이 눈발을 맞으며 숭어 낚시를 하고 있다. 그들은 편광안경을 쓴 채 바다를 들여다본다. 사흘째 계속되는 같은 풍경이다. 숭어는 해수면 바로 아래에서 무리지어 회유하고 있을 것이다.

겨울의 동해안 숭어는 눈에 지방질이 끼어 주변을 잘 살필 수가 없다고 한다. 이를테면 눈 먼 숭어다. 눈 먼 숭어를 잡기 위한 낚시바늘은 그래서 단순하고 폭력적인 형태를 취한다.

송곳니 같은 굵은 쇠바늘 여러 개가 입을 벌린 채 낚싯대에 매달려 출렁거리며 바다로 뛰어들 순간을 노리고 있다. 지난 사흘 동안 내 잠의 옆구리나 꼬리로 날아들어와 꽂혔던 훌치기 낚시의 육중한 바늘을 나는 묵묵히 바라본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순식간에 나는 바다를 떠나 허공으로 들어올려져 입만 벌린 채 매달려 있었다. 그때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허공을 채우는 눈송이가 바다로 내려와 담담하게 풀어지는 모습뿐이었다.

그 바다를 내려다보며 나는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숭어가 아니라 사람인데, 저들이 쓰고 있는 편광안경은 사람이 숭어로 보이는 것일까...

이것은 너무 잔인한 사랑의 표현이야. 사랑은 이런 게 아니야. 하지만 내 혼잣말은 허공을 건너는 눈발에 매달려 내가 떠나온 바다 속으로 잠기는 게 고작이었다. 낚시꾼들은 잠 밖에서도 변함없이 바다에 몰두한다. 그들의 등허리에 긴장이 몰리는 것을 멀리서도 느낄 수 있다.

나는 벽에 걸린 액자에 다시 시선을 고정시킨다. 내 눈을 향해 아가리를 벌린 채 전속력으로 날아오는 주먹만한 낚시바늘! 눈을 질끈 감는다. 눈 먼 숭어가 바다 밑으로 내려간다.

눈발은 그곳까지 들어오지 못한다. 연애를 해온 지 삼 년이 조금 지난 어느 날 밤, 서울의 안국동 시끄러운 주점에서 술을 마시다가 나는 그녀와 사소한 일로 싸움을 시작했다.

대개 그런 싸움은 성경의 문구처럼,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장대할지어다, 라는 문장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그 싸움도 그랬다. 그녀는 한참을 훌쩍거리다가 말했다.

"잠깐 나갔다 올게."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그녀를 기다리다 몇 잔의 술을 더 비웠다. 화장실을 살폈고 고개를 젓는 카운터의 여자로부터 돌아섰다. 시간은 꿈 속인 것처럼 흘렀다.

시끄럽던 주위가 조금씩 조용해져갈 때 이번에는 카운터의 여자가 내게 와서 영업시간이 끝났다고 일러줬다.

그날 밤 나는 안국동에서 종로로, 종로에서 청량리를 지나 회기동까지 걸었다. 물론 그녀가 가지고 있는 통신수단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잘 알겠지만, 연애란 때로 그런 경우가 있는 법이다. 그 통념에 발등이 찍히는 예외를 잊은 것은 아니었지만 연애하는 사람은 대개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녀는 정확히 한 달 후... 결국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눈송이를 흡수하는 바다의 파도가 거칠어지고 있다. 가까운 바다는 짙은 코발트블루로 변해간다. 피서철이 아닌 계절, 육지와 바다의 경계에서 서성거리는 것들은 늘 뒷주머니에 은밀한 무엇인가를 숨겨놓고 있는 것 같다.

함부로 꺼내서는 안 될 그 무엇을. 눈발이 날리는 바다의 가장자리는 봉분이 없는 해변의 공동묘지인 셈이다. 그 유형 무형의 시신을 먹으려고 물고기와 갈매기들이 몰려들고 낚시꾼들은 예리한 미늘이 붙은 낚시바늘을 던질 기회를 노린다.

다른 한쪽에서는 술과 이불을 팔고. 나는 북적거리는 방파제에 놓아두었던 시선의 걸음을 총총히 옮긴다.

내가 잠을 자고 있는 방은 여느 여관방과 다르지 않다. 단지 바다 쪽으로 통유리창이 있을 뿐이다. 민박집의 여주인은 지금은 서울에서 살고 있는 자신의 아들이 쓰던 방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들이 방을 썼다는 흔적은 없는 편이다. 옷장에 꽂혀 있는 낡은 책 몇 권이 고작이다.

침대. 탁자. 이 인용 소파 두 개. 큰 거울. 소형 냉장고. 텔레비전. 화장실 겸 욕실. 옷장 속의 책: 1 오성 취미 시리즈14 <민물낚시>, 2 더이상의 낚시교본은 없다 秘 오세호의 바다, 민물 종합 실전낚시, 3 한국의 나비, 4 동물도감(어린이용).

항구 도시의 야경이 사진으로 들어 있는 액자는 거울 맞은편 벽에 걸려 있다. 이것이 전부다. 아니 자세히 살펴보면 더 찾아낼 수도 있다. 재떨이나 휴지통, 물컵... 삼 년 전에도 여주인은 내게 같은 이야기를 했다. 지금은 서울에서 살고 있는 자신의 아들이 쓰던 방이라고. 물론 그 까닭으로 내가 이 방으로 들어와 사흘째 잠을 자는 것은 아니다.

옷장 옆 귀퉁이에는 노끈으로 묶은 라면상자가 궁색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가져온 짐이다.지난 사흘 동안 바다에 지쳐 돌아올 때 시선이 잠시 다가가 머무르곤 했지만 나는 애써 외면했다.

이 방으로 들어온 지 하루가 지난 시간, 여주인은 교도관 같은 표정으로 내 모습과 방을 살펴나갔다. 나는 꼬박 하루를 굶었다. 여주인은 다행히 삼 년 전의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총각, 밖으로 나가는 걸 못 봤는데...식사는 어떻게 하우?"

나는 소파에 앉아 주인의 시선을 쫓아갔다. 주인은 노끈에 묶인 라면상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별 생각이 없습니다."

"사람이 먹지 않고 어찌 사나. 죽으려고 온 것도 아닌데... 우리 아들과 나이가 엇비슷하겠구만."

주인은 여전히 라면상자를 노려보았다. 나는 담배를 찾아물고 불을 붙였다.

"정 배가 고프면 나가서 사 먹겠습니다."

라면상자에 불가사리처럼 시선을 붙여놓고 있던 여주인은 비로소 미소를 지으며 내 얼굴을 보았다.

"비싼 돈 주고 맛도 없는 식당에서 먹을 게 뭐 있어! 그 반값이면 여기서 먹는 게 훨 낫지. 다 우리 아들 같아서 하는 소리야!"

나는 주인 여자의 요구 조건을 대부분 수락했다. 식사는 하루 세 끼에서 두 끼로. 식비를 포함해 돌아오는 일요일까지의 숙박비도 선불로 지급했다.

주인의 큰 양보는 일 층에서 내가 머무는 방으로 식사를 가져다 준다는 점이다. 우리 두 사람은 그 점을 놓고 지루한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주인은, 아들 같은 내가 아래로 내려와 식사를 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했고 더욱이 자신은 일 층에 혼자 살고 있어서 내가 생각하는 번잡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럴 거면 차라리 포구의 식당으로 가겠다고 맞서 주인의 못마땅하다는 눈빛의 양보를 얻었다. 다행히 주인은 식사를 가져다 줄 때의 참견을 빼놓고 더이상 아무 때나 방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어제 저녁, 주인은 밥상을 내려놓으며 재빠르게 옷장 옆의 라면상자를 훑어보고 물었다.

"총각, 설마 딴 생각 먹고 여기에 머무는 건 아니지?"

나는 여주인을 밀치고 문을 닫아버렸다. 문 밖에서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얼마간 들려왔다. 그 중에는 방파제에 나가 숭어 낚시를 해보라는 권유도 있었다.

방파제의 낚시꾼들은 여전히 편광안경 너머의 바다에 몰두한다. 바다의 색은 네이비블루이거나 코발트블루이고 아니면 진북청색이다. 어쩌면 회색일지도 모른다. 나는 침대에 모로 누운 채 바다와 하늘, 그리고 텔레비전의 유선방송을 보다가 눈을 감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