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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생산적 갈등’의 계기로 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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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몇 년 전에 타계한 백남준 선생은 예술을 사기라고 했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고등사기며, 자신을 큰 사기꾼이라 칭했다. 한국인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국제적으로 가장 인정받는 인물의 사기론은 당혹스러웠지만 통쾌함도 수반했다. 그의 느닷없는 사기론은 예술이 사기든 아니든 그 진위를 떠나 우리 자신을 여러모로 돌아보게 했기 때문이다. 나 자신과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한 자문. 일상의 울타리를 쳇바퀴처럼 도는 관성에 젖어 잊고 있던 자기성찰을 아프게 호출했다. 그것은 생각할 줄 알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직립원인으로서의 인간 존재에 대한 자각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사기론의 혐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선두는 정치 부문이다. 여론조사의 변함없는 결과다. 이들 정치인과 정당들이 세종시 문제를 둘러싸고 전면전을 벌이면서 다시 나라를 들쑤시고 있다. 11일 국무총리의 세종시에 대한 수정안 발표를 분수령으로 한반도는 찬반으로 펄펄 끓기 시작했다.

지난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선출을 위한 민주당 대전 경선에서 공개적으로 거론된 신행정수도 건설은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포함한 우여곡절을 거쳐 9부2처2청을 옮기는 행정중심복합도시 안으로 바뀌었다. 정부 부처 이전을 백지화하는 이번 수정안 발표로 세종시 문제는 국가의 백년대계, 국토의 균형발전, 국민과의 신뢰, 지역 우대와 차별, 정치세력 간의 대결, 차기 대통령 선거, 정권의 레임덕 등 하나같이 쉽지 않은 문제들이 뒤얽힌 난마가 되었다. 정부와 여당, 야당, 각 자치단체 등을 비롯한 정치권은 말할 나위도 없고, 충청도민을 비롯한 지역 주민들도 이해관계에 따라 제각각 다양한 의견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세종시의 진로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어떻게 진행될지는 과거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 못 할 바 아니다. 공복정신과 미래에 대한 비전이 결여된 정치인들의 정파적 말들이 신문과 텔레비전, 기자회견과 토론회, 성명과 집단행동을 통해 전 국토를 말싸움의 악취로 진동케 할 것이다. 혼돈과 무질서의 카오스의 세계를 정돈과 질서의 세계로 옮겨야 할 말이 오히려 우리의 공동체에 심각한 갈등을 조장할 것이다.

하지만 갈등이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갈등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촉진하고 집단 내의 응집성을 향상시키며, 다양한 의견의 분출로 보다 훌륭한 의사결정을 끌어낼 수도 있다. 세종시와 같은 중요한 이슈 결정 과정이 너무 조용한 것은 그리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복잡한 이슈에는 복잡하고 뜨거운 갈등이 필요하다. 한 나라의 미래를 위해 선택해야 할 결정이라면 갈등을 피하기보다는 더 혹독한 갈등 과정을 감내해야 한다. 갈등 극복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합의만이 문제 해결에 대한 설득력과 구체적인 실천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활발한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통한 생산적 갈등은 건전한 말과 설득을 통해 소통하면서 합의를 구해 가는 것이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만 끝까지 고집하면 결국 서로가 쓰러지는 치킨게임으로 치달아 파국을 초래할 뿐이다. 상대편을 구분하고 편을 가르고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견 차이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대화를 통해 상대방에게 다가가야 한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문제를 해결하고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는 데 가장 확실하고 효율적인 방법이다.

갈등 극복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말과 행동에서 폭력성을 배제하는 일이다. 폭력이 얼룩진 파괴적 갈등은 당당하고 공명정대한 사고와 행동의 바탕이 되는 인격과 합리성을 훼손한다. 특히 언어적인 폭력은 물리적인 폭력보다도 더 치명적이고 더 지속적이며,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남긴다. 정치권이 보여온 파괴적 갈등을 타파하고 생산적 갈등이 이루어지려면 폭력적인 언어를 자제하고 비전과 구체적인 방안에 대한 경쟁을 해야 한다.

입만 열면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인들에게서 ‘사기론’의 고백을 듣는 것은 요원할 터이다. 그러니 국민들이 정치인과 정당의 정파적인 주장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이번 논쟁이 생산적 갈등이 되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냉철한 비평자가 되어 상대를 인정하면서 건설적으로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주도하는 정치 세력에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새로운 정책들이 야기할 수 있는 문제들을 생산적 갈등으로 극복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김정기 한양대 교수·신문방송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