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up] 세종시에 종합추모시설 개관한 최태원 SK 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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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고인이 된 아버지의 모습이 대형 스크린을 채웠다. 12년 만에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실현하는 자리였다. 12일 충남 연기군의 세종시 예정지에 있는 종합추모시설인 ‘은하수공원 장례문화센터’ 개관식에 참석한 SK그룹 최태원(얼굴) 회장 얘기다.

SK는 500억원을 들여 은하수공원의 장례시설을 지어 국가에 무상 기부했다. 1998년 세상을 떠난 고(故) 최종현 회장이 생전에 “내가 죽거든 화장해라. 그리고 수준 높은 화장시설을 만들어 사회에 기증하라”고 했던 뜻에 따른 것이다.

장남인 최태원 회장은 이날 짧은 기념사를 하는 동안 여러 번 헛기침을 했다. 지난 세월이 떠오르는 듯했다. SK는 원래 서울에 화장장을 지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지역 주민 등의 반대로 무산됐다. 최 회장이 기념사에서 “여러 군데서 얘기를 하고, 지방자치단체 쪽에서도 하겠다는 말은 있었지만 막상 만나면 ‘님비’(NIMBY: Not in My Backyard) 때문에 실현이 안 됐다”고 말한 이유다.

12년이 흐르는 동안 서른여덟 청년이던 아들은 쉰 살의 장년이 됐다. 최태원 회장은 “정성스럽게 조상을 모시는 전통은 이어가야겠지만 후손에게 아름다운 강산을 물려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뿌리 깊은 매장 문화로 ‘금수강산’이 ‘묘지강산’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그는 “지금까지 잘사는 ‘웰빙’이 얘기돼 왔지만 앞으론 잘 죽는 ‘웰 다잉’도 꼭 실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행사에 함께 참석한 손길승 SK 명예회장은 “고 최종현 회장은 무덤으로 인해 생기는 좁은 국토의 비효율을 항상 걱정했다”며 “조금이라도 빨리 (화장장 건설을) 하려 했는데 10년이 넘은 오늘에야 그 뜻을 받들게 돼 대단히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곳이 지역구(공주-연기)인 심대평 의원은 단상에 올라 “고 최종현 회장의 선견지명과 함께 선대의 뜻을 받든 최태원 회장의 효성에도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자리에 앉아있던 최태원 회장은 쑥스럽다는 듯 잠시 고개를 숙였다. 기념식을 마치고 시설을 둘러보던 최 회장에게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기자에게 “와서 보니 나중에 (죽어서) 올 만하냐”고 되물었다.

최 회장에게 화장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자 “이렇게 만들어 놨는데… (해야 하지 않겠느냐)”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무덤 만들어 놓고 (후손에게) 그거 지키라고 하는 것도 별로 믿을 만한 게 못 된다”며 다시 웃었다. 벌써 세 번째 이곳을 찾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최 회장은 올 초 신년사에서 “올해를 ‘글로벌’에서 성과를 내는 해로 삼아야 한다”고 했었다. 밥 지을 솥을 깨고 돌아갈 배를 가라앉히는 ‘파부침주(破釜沈舟)’의 각오로 새로운 도약을 이뤄야 한다고도 했다. 행사가 끝난 뒤 차에 오르려는 그에게 글로벌화에 대한 복안이 있느냐고 물었다. “글로벌은 복안으로 하는 게 아니다. 일단 부딪쳐 보는 거다.” 방금 전까지 숙연한 모습을 보였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결기가 대단했다.

연기=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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