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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색 때문에 무시 안 당하려 일부러 영어 쓰기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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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책상마다 한국어 사전이 놓여 있다. 노트에는 비뚤비뚤한 한국어가 한가득이다. 교단의 교수는 한국의 호칭에 대해 설명한다. 교수가 “이름 뒤에 ‘~씨’라고 붙이면 별 무리 없어요”라고 말하자 한 학생이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한다.

“그럼 아가씨 할 때 ‘씨’도 이름 뒤에 붙이는 말인가요?” 한국어가 능숙한 몇몇 학생은 크게 웃었고, 아직 서툰 학생은 무슨 영문인지 궁금해했다.

6일 오후 3시 경인교육대학 경기캠퍼스 교사교육센터 4층 414호에서는 6개국에서 온 34명의 외국인 학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었다. 대부분 20~40대의 다문화가정 여성인 이들은 초등학교의 다문화 전문 교사(이중언어 교수 요원)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있다.

경인교대 한국다문화교육연구원(원장 장인실 교수)이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지난해 11월 시작해 올 5월까지 계속된다. 학생들은 한국어ㆍ한국문화ㆍ교수법ㆍ아동심리 등을 배운다. 6일은 2주간의 겨울방학을 마치고 개학하는 날이었다. 원래 개학일은 월요일이었지만 갑자기 쏟아진 폭설 때문에 이틀 연기됐다. 이날도 얼어붙은 도로 때문에 40명 중 34명만 학교에 올 수 있었다. 34명의 학생 중 대만ㆍ말레이시아ㆍ몽골ㆍ베트남ㆍ중국, 다섯 나라, 다섯 명의 다문화가정 여성들이 수업 후 교실에 남았다.

짧게는 3년, 길게는 15년 동안 한국생활을 하며 경험한 일들과 느낀 점에 대해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자리가 마련됐다. 원활한 진행을 위해 기자는 큰 주제만 제시했고 모든 대화는 학생들이 이끌어갔다.

한국 사회에 적응하기

▶정태옥(쩡타이위) 2001년 중국에서 한국으로 왔다. 그때 중국에선 한국은 부자 나라여서 모두 1회용 물건만 쓴다는 소문이 있었다. 심지어 이불도 한 번 쓰고 버린다는 얘기도 들었다. (웃음) 중국에선 의사였다. 그래서 힘들게 산 적은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선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20만원짜리 반지하방이 첫 집이었다.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

▶이혜평(리훼이핑) 나도 한국 와서 생활수준이 확 달라진 게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한국에 비해 못사는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은 모두 밥도 못 먹고 산다고 생각하는 한국사람들의 편견이 더 불편했다.

▶한이슬(부렝토야) 어떤 사람은 내가 몽골에서 왔다고 하니까 ‘이제 세 끼 밥 다 먹으니까 좋지?’라고 묻더라. 그때 많이 속상했다. 몽골에서도 잘 먹었는데…여기 밥 먹으러 온 게 아닌데….

▶정태옥 나도 그런 말 들은 적 있다. 식당에서 TV를 보는데 옆에 앉은 아저씨가 ‘너네 나라는 이런 것도 없지?’라고 묻더라. 뭐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속으로 ‘우리집 TV는 이거보다 큰데’라고만 생각했다.(웃음)

▶왕시시(웡시시)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몇년 전만 해도 한국사람들한테 우리는 외국인이 아닌 것 같았다. 외국인은 미국이나 프랑스 같은 데서 온 사람들이고 우리는 그냥 ‘쭝꾸(중국), 동남아’라고 불렀다.

▶이혜평 그래서 나는 가끔 영어를 쓴다. 그러면 훨씬 더 편해진다. 대우가 달라진다.

▶왕시시 나도 그런 적 많다. 영어를 쓰면 나를 보는 시선이 180도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한테 영어도 가르친다. 나중에 무시당하지 말라고.

▶황은정(황티프엉) 그래도 살기 좋아진 거다. 나는 1995년에 한국에 왔는데 그때는 정말 힘들었다. 의료보험도 안 되고 내 이름으로 통장도 못 만들었다. 외국인이 살기 너무 힘든 시절이었다.

명절 때 친척들이 모이면

▶한이슬 우리 시어머니는 내가 잘 모르니까 아예 일을 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명절 때 몸이 힘들진 않은데 친척들이 모이면 긴장된다. 한국말도 잘 못하고 문화도 잘 모르는데 혹시라도 실수할까봐. 그래서 아예 말을 안 한다.

▶황은정 처음 몇 년은 명절이나 제사 때 너무 힘들었다. 한국말도 잘 못하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데 친척들은 많이 오고…. 걱정돼서 보름 전부터 잠을 못 잤다. 그런데 요즘은 한국사람 다 됐는지, 손아래 친척이 나한테 존댓말 안 쓰는 게 신경 쓰이더라.

▶정태옥 시부모님이 미국에 계셔서 우리가 제사를 지낸다. 잘 못하지만 시어머님이 전화로 알려주면 그대로 상을 차린다. 며칠 전 신정 때도 차례를 지냈다. 남편이 절하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올해 차례상은 중국 음식 맛 나겠네요’ 라고 하더라. 그래서 나도 ‘예전 맛이랑 다를 거예요. 그래도 맛있게 드세요’ 라고 했다.(모두 웃음)

▶왕시시 나는 남편이 막내라서 일이 많지 않은 데다 큰형님이 많이 도와준다. 그래서 힘들진 않다. 다만 친척들이 모이면 소외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우리에게 ‘다문화’라는 말은

▶황은정 ‘다문화’라는 단어조차 없던 90년대를 생각하면 좋긴 하다. 하지만 가끔은 지나치게 배려하는 게 오히려 차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정부나 시민단체가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건 안다. 하지만 한국인과 우리를 구분 짓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한이슬 맞다. 다문화라고 하면 뭔가 좋지 않은 느낌이다. 아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에 얼마 전까지 외국인 아이가 한 명 더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나가니까 선생님이 ‘이제 우리 어린이집에는 다문화가정 아이가 한 명이네요’라고 하더라. 물론 선생님은 별 생각 없이 한 얘기겠지만 기분 나빴다.

▶왕시시 우리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친구들 얘기 들어보면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많이 힘들어 하더라. 초등학교에 가면 아이들이 ‘너는 외국사람이다, 피부가 검다’라며 놀린다고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아이들 다 있는 데서 ‘다문화가정인 사람 손들어 봐’라고 한다고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더 왕따가 된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도 걱정이다.

▶이혜평 이제 한국에도 외국인이 많이 사는데, 자연스럽게 어울려 사는 게 중요한 것 아닌가. ‘다문화’라는 말로 선을 긋고 그 안에 가두는 것은 크게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정태옥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다문화’라는 단어는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다. 이 단어 덕분에 한국사람들이 우리를 좀 더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 같다. 문제는 다문화를 앞세워 무작정 이벤트만 벌이는 것이다. 가만 보면 실질적으로 도움되지 않는, 보이기 위한 행사가 많은 것 같다. 그런 행사보다 한국어나 문화를 배우는 것이 우리한텐 더 절실하다.

▶황은정 일단 조사를 정확히 하고 도움을 줘야 하는데, 조사 자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왕시시 우리 말레이시아에도 외국 사람이 많이 산다. 하지만 ‘다문화’같이, 외국인을 구별하는 단어 없이도 다들 잘 어울려 산다. 결국 마음가짐의 문제인 것 같다.

▶이혜평 한국사람은 ‘우리’ 아니면 ‘너, 외부인’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편견이 한국에서 생활하는 외국인들을 힘들게 한다.

다문화 전문 교사로 경인교대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6개국 34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최정동 기자


한국에서 계속 살까

▶황은정 어떤 교수님이 한국이랑 일본이 축구할 때 한국 응원하면 한국사람이라던데, 지금은 당연히 한국을 응원한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땐 3년만 있다 돌아가야지 했는데, 내가 지금 베트남으로 돌아가면 거기서 또다시 외국인이 될 것이다. 이제는 한국이 내 고향이고 여기서 뼈를 묻고 싶다.

▶왕시시 나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차피 돌아갈 건데라고 생각하면서 한국어 공부도 안 했다. 지금은 한국이 좋다. 무엇보다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 것이다. 나중에 ‘다문화가정 아이가 한국아이보다 더 낫다’ 라는 말을 듣고 싶다.

▶정태옥 처음엔 3년만 견뎌보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3년이 지나니까 어느 정도 적응되고 살 만하더라. 요즘은 신랑한테 젊을 땐 한국에서 살다가 나중에 나이 먹으면 중국 가서 살자고 한다.

▶한이슬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직 몇 년 안 돼서 그런가? 어쨌든 지금은 좋다. 한국말이 익숙해지면서 한국생활도 점점 자연스러워지는 것 같다.

한국생활을 시작하는 외국인들에게

▶왕시시 가장 먼저 어학당 가서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 또 시어머니랑 같이 사는 것도 좋다. 물론 시어머니를 잘 만나야 하겠지만(웃음). 나 같은 경우엔 시어머니한테 한국문화를 많이 배웠다. 지금은 따로 사는데, 한국음식 만드는 법을 배운 것이 많이 도움 된다.

▶정태옥 배우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모국 문화만 고집하면 안 된다. 한국에 왔으면 한국 문화를 배워야 내가 편하다. 처음에 나는 한국 문화를 배우려 하지 않았다. 중국 문화와 다른 것이 참기 힘들었다. 지나고 보니 어리석은 생각이더라.

▶한이슬 한국 친구들을 많이 사귀는 게 도움이 된다. 외국인끼리만 뭉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지 말고 한국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는 게 좋은 것 같다.

▶이혜평 세상 어디에도 좋은 것만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반대로 나쁜 것만 있는 곳도 없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장점을 많이 보려고 노력하고 늘 배우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황은정 ‘원래’라는 것을 잘 배워야 한다. ‘한국 사람은 원래 이렇다’에서 ‘원래’를 이해하면 한국에서 생활하는 데 큰 문제 없을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대화를 많이 하면서 직접 부딪쳐 보는 게 좋다.

임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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