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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48>어느 소설가의 비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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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호 10면

왕성한 작품활동을 편 것도 아니었고, 크게 주목을 끌 만한 작품을 내놓지도 못했지만 해방 후 한국문단의 움직임에는 늘 그의 이름이 끼어 있었다. 6·25전쟁 중에는 종군작가단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부산ㆍ대구의 피란 문단에서도 그의 이름은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는 적이 없었다. 1962년 한국문인협회가 창립된 이후에는 사무국장으로, 상임이사로 오랫동안 협회의 살림을 도맡기도 했다. 소설가이자 아동문학가인 이종환(1920~1976)-.

경북 월성에서 태어난 이종환은 청소년기에 별다른 이유 없이 고향을 떠나 7~8년간 만주 일대를 유랑하면서 그의 삶이 평탄치 못할 것임을 예고했다. 유랑생활 막바지 천주교가 운영하던 고아원에 들어가 비슷한 연배의 방기환을 만난 것이 전환점이었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도 가출과 방랑 끝에 고아원에까지 들어간 것은 일제 치하 암흑기의 희망 없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했던 소년다운 감수성의 발로였을 것이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고아원을 나와 해방 후 문필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미 만주 시절 ‘만선일보’에 소설을 발표한 경험을 가지고 있던 이종환은 47년 희곡 ‘여와’를 써 시공관에서 공연, 문단에 그의 이름을 처음 알렸다. 이종환은 그후 한국신학대를 졸업하고 ‘새벗’ ‘현대공론’ 등 여러 잡지의 편집장을 거치면서 문단에 안면을 넓히고 소설도 계속 발표했다.

50년대 초 유능한 산부인과 여의사와 결혼하면서 그의 앞날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성격도 둥글둥글하고 언변도 좋은 데다가 모두가 어려운 시절에 문인들의 술값도 늘 도맡았기 때문에 문단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아내가 느닷없이 3년 예정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면서 그는 혼란과 회의에 빠지게 된 것이다. 두 아들의 뒷바라지는 그의 몫이 되었고, 그는 생활의 리듬을 잃고 방황하기 일쑤였다. 성격도 완전히 뒤바뀌어 말수가 적어지고 사람들 만나기를 꺼렸다.

더 큰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3년 만에 귀국한 아내는 얼마 뒤 일방적으로 이혼을 선언했다. 문단에서는 그의 성 기능의 급작스러운 저하가 이유일 것이라고 보았다. 이종환은 속수무책으로 아내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아내는 병원과 집을 처분하고 두 아들을 남겨둔 채 아프리카로 떠나버렸다. 70년대 초, 집도 없고 일정한 수입도 없는 그는 두 아들과 함께 셋방살이를 전전해야 했다. 다행히 둔촌동에 넓은 땅을 사서 집을 지어 살고 있던 방기환이 땅을 조금 떼어주어 집을 지어 살게 해 다소나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가까웠던 문인들은 이종환의 재기를 위해 조언도 많이 했고, 실질적인 도움을 베풀기도 했다. 그 무렵 문인협회 이사장과 예술문화윤리위원회 위원장을 겸하고 있던 동갑내기 조연현은 ‘예륜’의 심의위원직을 맡게 해 소일토록 했고, 가장 친했던 황금찬은 기회 있을 때마다 생활 안정과 두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재혼하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이미 삶의 의욕을 잃어가고 있던 그는 그때마다 ‘여자가 무섭다’는 한마디 말로 재혼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를 몹시 따르던 여성도 있었지만 또 다른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 무렵 이종환에게 마지막 불행이 덮쳤다. 둔촌동 집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쓰러진 것이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발견돼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보름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의식을 되찾은 후에도 그는 이따금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는가 하면 갑자기 졸도해 병원에 실려가곤 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병상에서 ‘눈 오는 날’이란 제목의 단편소설 한 편을 완성했다. 음악대학에서 바이올린 교수로 일하던 주인공이 고혈압으로 쓰러져 학교도 그만두고 아내에게도 버림 받아 거리의 악사로 떠돌며 구걸행각을 벌이다가 눈이 많이 내리는 어느 날 눈길 위에 쓰러져 죽는다는 내용이었다. 설정은 다르지만 그 자신의 이야기였다.

그 작품을 쓰고 얼마 뒤 이종환은 ‘예륜’에 출근해 심의 도중 또 쓰러져 병원에 옮겨졌으나 깨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56세였다. 그는 운명하기 얼마 전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자기가 죽으면 집례는 조향록 목사가 맡게 하고 황금찬으로 하여금 조시(弔詩)를 읽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조연현은 직무 수행 중에 운명했다는 명분으로 이종환의 장례를 전례 없는 ‘예륜’장으로 치렀고 장례 절차를 고인의 뜻에 따랐다. 이종환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유작 ‘눈 오는 날’은 ‘월간문학’에 발표됐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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