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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동안의 귀향] 下. 북태도 안타까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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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번 방북 중에 내가 가장 놀랐고 흐뭇했던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소식이었다. 북한적십자의 특별배려에 의해 이번 사업의 지원인원 중 한사람으로 들어갔던 장가용 교수와 나만은 따로 보통강여관에 마련된 1층 방에서 각각 오붓하고도 조촐하게 친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기 이미 누이동생이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대뜸 "오빠!" 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르며 가슴으로 깊이 안겨왔다.

나도 마주 얼싸안으며 와락 울음이 터져나오려고 했지만 애써 억누르고, 50년 만에 만난 영덕이(누이동생 이름)의 등을 살짝 어루만지며 나지막하게 지껄였다.

"울지 말자. 우린 절대로 울지 말자. 자, 자, 진정하고 여기 앉자" 하자, 내 오른쪽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던 영덕이도 금방 내 말에 좇듯이 평상의 얼굴로 돌아오며 얌전하게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물론 내 쪽에서는 미리 이러자고 결심까지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현장에 닥쳐 보아야 알 일이긴 하겠지만 나는, 가능하면 울고불고 하?않았으면 하고 스스로 다짐했던 것이었다.

역시 같은 피를 이어받은지라 영덕이도 이심전심 오빠 뜻에 따라 주었다. 하긴, 서울 돌아와서 한 제자가 들려준 말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서로 얼싸안고 있는 어느 짧은 한 순간의 내 표정은 어떤 울음보다도 짙은 처연함을 드러내더라는 것이었다.

그 제자 말은 그 순간의 내 표정은 남북 통틀어 이번 2백건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10건을 고른다면 그 속에 끼일 만도 하겠다고 하질 않는가.

차라리 더 더 진짜배기 울음이 거기 있더라는 것이다. 이어 그 제자가 "선생님의 그 울음에 비긴다면 다른 사람들은 멜러물처럼도 보이던데요" 라고 해, 함부로 그런 소릴 입에 올리는 게 아니라고 나는 주의까지 주었던 거였다.

그러고 보면 휭하게 현기증이 이는 것 같던 그 짧은 한 순간은 나 자신도 또렷이 기억이 된다.

그렇게 마주앉은 누이동생은, 첫눈에도 잘 커서, 저 나이까지 이르렀구나, 싶었다. 대견하고 고마웠다.

쉰여덟살 된 누이동생을 두고 이런 생각부터 하는 나 자신이 조금 어이없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이쪽은 열살이 더 많은 큰오빠가 아닌가.

그동안의 친족들 소식, 그 중에서도 조부.부모님의 정확한 기일(忌日)부터 아는 것이 급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제사를 모셔오는 터였기 때문이다.

사망 날짜 모르는 조상 제사는 음력으로 중굿날, 9월 9일에 모신대서 30년 전부터 제사를 지내 오고 있다.

한데 정확한 기일은 작은오빠가 알지, 자기는 모른다질 않는가. 중풍을 앓고 있다지만 부축을 받아 변소 같은 데도 드나들 수 있는 정도 인데다, 아들을 다섯이나 낳아 제사를 모실 때는 뻑적지근하게 모여들고, 성묘도 아들들마다 음식을 차려와 빠뜨리지 않고 있으니 큰오빠는 아예 걱정일랑 말라는 것이 아닌가.

누님 둘은 1953년과 59년에 각각 세상을 떠났노라고 했다. 두 분 모두 마흔살 전후에 요절한 모양이었다. 가슴이 싸아하게 아려왔다.

한데 정확한 기일은 모르지만 아버지는 75년에 71세로 운명하셨고, 어머니도 67년 67세로 돌아가셨다질 않는가. 전혀 뜻밖이고 놀라웠다.

나는 가슴이 흐뭇해 오면서도 좀체 그대로 믿어지지 않아 대여섯번이나 거푸 물어보곤 했다.

그렇게 호텔방 안에 단둘이 서너시간을 마주앉아 냉면 한그릇씩도 시켜 먹고 나는 들쭉술 한병도 시켜 마시는 동안 누이동생은 뭔지 모르게 좌불안석, 조마조마해하던 것이었다.

시종 들쫓기는 얼굴이었다. 그 점도 나로서 짐작이 전혀 안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2, 3일 전에 평양에 와서 관계기관 요원들의 단단한 닦달을 받았을 터였다.

지난 50년간 남쪽의 대표적인 작가로 소설을 써온 나로서 어찌 그런 정도를 모를 것인가. 내 눈을 속이려 든다면 그건 처음부터 오산인 것이다.

그런 쪽으로 말한다면 나는 차라리 북한 안의 그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쪽의 한사람이지만, 1차 남북 이산가족 교환방문이 일단 끝난 어제 오늘, 우리 남한 사회 곳곳에서 우스갯소리로 회자되고 있는, 이번에 같이 방북했던 고물장수 할아버지에게 고래고래 악다구니를 쓰던 그 딸의 행태 같은 것이 이 남쪽 사회에 그대로 먹혀들리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너무너무 시대착오임을 북한 당국은 왜 아직까지도 저렇게도 모르는가.

알면서도, 당장은 어찌할 수 없이 하나의 관성 같은 것으로 저러는 것인가.

이건 진정으로 나 나름의 애정을 갖고 하는 소리이니 북쪽 관계당국의 종사자들께서도 내 이 소리에는 한번 제대로 귀기울여 주었으면 싶다.

이호철 실향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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