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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한반도 시대'의 조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경의선 철도의 끊어진 구간 20㎞를 되살리면 부산에서 포르투갈의 리스본까지 1만5천㎞를 달리는 꿈의 국제열차가 우리 앞에 등장한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말하는 철의 실크로드다.

경의선철도의 복구로 남북한이 장기적으로 얻게 될 경제적 이득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것이지만, 그것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일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인들은 한반도의 벼랑에 매달려 대륙을 등지고 옹색하게 살아왔다. 서울에서 파리까지 바로 달리는 철길은 한국인들에게는 새로운 활동무대뿐 아니라 넓은 의식(意識)의 지평이 열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철의 실크로드에 대한 金대통령의 열정 또한 남북의 경제협력과 동북아시아 물류센터, 그리고 유라시아대륙으로의 경제적 진출 같은 현실정책의 수준을 넘어서 낭만적이기까지 한 것 같다.

金대통령은 평양에서의 귀국보고에서 남북이 철도를 연결해 새로운 천년의 실크로드를 연다고 말하고도 광복절 연설에서 다시 중국.러시아를 관통하는 철의 실크로드를 열자고 역설했다.

金대통령은 철의 실크로드 구상을 한반도시대의 개막으로 확대.발전시킨다. 한반도에서 유럽까지 새 천년의 실크로드가 열리면 한국은 태평양과 유라시아대륙을 연결하는 거점이 되고, 아시아대륙 동쪽 끝의 주변국가에서 세계의 중심국가가 된다는 것이다.

한반도시대의 꿈은 金대통령과 한국인들을 매료시킬 만하다. 한국이 전세계 인구의 75%와 국민총생산(GNP)의 60%와 확인된 에너지 매장량의 4분의3을 갖고 있는 유라시아대륙에 철길로 편입된다는 것은 한국인 모두에게 가슴 벅찬 일이다.

한국은 태평양과 유라시아대륙을 잇는 교량이 될 뿐 아니라 2025년까지는 8억의 미국.유럽인들의 구매력의 두배의 구매력을 갖고, 전세계 GNP의 거의 4분의1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25억 아시아인들의 경제활동의 중심에 설 수 있다.

한반도시대는 비전과 이상으로는 손색이 없다. 그러나 국제열차로 서울에서 파리까지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이 곧 한반도시대의 실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아시아 GNP의 70%를 차지하지만 일본시대를 말하는 사람은 없다. 로마와 대영제국.미국의 시대가 경제와 군사력과 전략적인 위치만으로 가능했던 게 아니다. 문명과 진취적인 정신과 비전의 축적 결과다.

철의 실크로드에는 일본이 강력한 경쟁자다. 일본은 규슈(九州)에서 쓰시마(對馬)섬을 경유, 부산에 이르는 2백35㎞의 해저터널과 교량으로 일본과 아시아대륙을 잇는 원대한 동아시아 하이웨이 구상의 연구를 거의 끝냈다.

부산까지의 해저터널이 실현되면 후쿠오카(福岡)에서 시속 1백㎞의 자동차로 서울까지의 6백50㎞를 6시간반에, 서울에서 베이징(北京)까지의 1천2백㎞를 12시간에 달릴 수 있게 된다.

최근에는 철도를 홋카이도(北海道)와 사할린을 거쳐 시베리아철도로 연결하는 일본판 철의 실크로드 구상까지 다듬고 있다.

한반도시대는 아직은 정치적인 꿈이다. 그러나 꾸어볼 만한 꿈이다. 다만 조건이 있다. 남북관계의 실질적인 진전으로 한반도에 확실한 평화가 정착되고, 남북한을 중심으로 주변4강이 참여하는 평화와 번영을 위한 협의체를 창설하는 게 그 하나요, 대륙편입을 갈망하는 일본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를 묶어 동북아시아 공동체 구상의 큰 틀 안에서 새 천년의 실크로드를 까는 것이 그 둘이요, 따라서 장기적인 플랜에 따르는 것이 그 셋이다.

과장 없는 수사(修辭) 없고 수사 없는 정치 없다. 키케로의 말대로 영지(英智.intelligence)를 갖춘 수사는 정치의 효율을 높인다. 동북아시아의 경제뿐 아니라 정치.문화.역사의 총체적인 맥락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한반도시대에 관한 수사를 즐기는 金대통령에게 요구되는 영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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