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어 본 정치] 북 체제 정통성 격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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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 "평화를 위한 싸움이 가장 어려운 싸움이다.

오늘 조인식은 이해와 평화를 가져올 축복의 협정이다."

▶라빈 이스라엘 총리〓 "우리에게 드리워진 슬픔을 걷어내고 '무기여 잘 있거라' 라고 얘기할 수 있는 날을 위해 기도하자. "

1993년 9월 13일,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 잔디밭. 빌 클린턴 미 대통령 중재로 중동 평화정착의 기반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정 서명식 모습이다.

'세기의 만남' 으로 명명된 두 지도자의 연설은 평화의 길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암시했다.

그들은 평화의 적'(敵)'이 내부에도 있으며, 지도자는 내부의 반대세력을 용기있게 설득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2년 뒤, 라빈 총리는 팔레스타인과의 타협에 불만을 품은 유대 정통주의 세력의 총격을 받았다.

아랍 쪽에도 그런 비극이 있었다. 이스라엘과 평화의 물꼬(78년 캠프 데이비드협정)를 튼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3년 뒤 이슬람 원리주의를 추종하는 장교들의 기관총 세례를 받았다.

두가지 사례는 오랜 적대 세력 사이에 화해를 추구하는 지도자들이 자기가 대표하는 집단에서 치러야 했던 대가의 극단적 장면들이다.

신'(新)'남북정국의 한복판에 있는 김대중 대통령은 앞의 예를 들며 "이런 지도자들이 나와서 역사를 이끄는 것을 보면 인생에 긍지와 의미를 느낀다" 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지도자의)용기는 반대편하고 생사를 걸고 싸우는 것도 용기지만, 더 어려운 용기는 같은 편에서 배신자라는 오해를 받으면서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 이라고도 했다(94년 출간 '나의 길 나의 사상' 에서).

지난 12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한 언론사 사장단과 나눴던 대화 중엔 우리쪽 판단으론 북쪽 내부에서 '오해살 만한' 대목이 있어 흥미로웠다.

"(통일문제는)지금까지 북남 공히 과거정권 탓" "(박정희 전 대통령 평가)그때 환경에서는 유신이고 뭐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남한 적화통일을 규정한)노동당 규약도 고정불변의 것은 아니다" 고 한 것 등이다.

북한에 金위원장의 반대세력이 있다면 "과거 북한체제의 정통성을 격하하고 박정희를 찬양했다" 는 비판이 나올 법하다.

우리쪽 북한전문가는 20일 "그의 발언은 북한 주민에게 공개하지 않는 대남용이라는 한계가 있다" 면서도 "군부를 비롯한 자신의 주변을 설득하기 위해 金위원장은 그들식 표현대로 '영웅적인 용기' 를 내야 할 것" 이라고 지적했다.

전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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