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초가 가른 217억 싸움 … 6년 만에 탄로난 ‘작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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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국내 대기업인 D사는 2003년 4월 보유 중이던 한미은행 주식 285만 주(226억원어치)를 외국계 D증권에 주당 7892원에 팔았다.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였다. 두 회사는 주식을 매매하면서 1년 만기 콜옵션과 녹아웃 옵션을 걸었다. D사가 1년 뒤 한미은행 주식을 판 가격과 같은 가격에 D증권으로부터 되살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미은행의 주가가 단 하루라도 종가 기준으로 2배(1만5784원)가 넘으면 D사는 D증권으로부터 주식을 되살 수 없게 했다. 이 경우 D증권은 D사에게 7억원의 리베이트를 줘야 하는 조건이었다.

D사 입장에서는 주식을 팔아 넘긴 뒤 주가가 1만5784원까지만 오르면 콜옵션을 행사해 최대 226억원의 이득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주가가 더 오르면 7억원만 받는 데 그치게 된다.

문제는 미국계 씨티은행이 한미은행을 인수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주가가 계속 오르기 시작하면서 불거졌다. 인수가 거의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D증권은 주가가 1만5784원을 넘길 바랐다. 반면 D사는 주가가 무조건 1만5784원 이하로 유지되길 원했다.

2004년 2월 19일 장중 주가가 처음으로 1만5700원을 넘어서게 되자 D증권이 선수를 쳤다. 같은 날 오후 2시49분59초쯤 한미은행 주식 10만주 매수 주문을 냈다. 주가는 1만5800원이 됐다. 이에 맞서 D사는 오후 2시59분37초쯤 보유 중이던 35만 주를 매도 주문했다. 주가는 1만5300원으로 급락했다.

6초 후인 오후 2시59분43초쯤 D증권은 93만 주를 매수주문해 주가를 다시 1만5800원으로 끌어올렸다. 오후 3시 주식시장은 마감됐고 종가는 1만5800원을 기록됐다. 이로써 양측의 매도·매수 공방은 11분 만에 D증권의 승리로 끝났다. 이 같은 거래는 금융감독원에 뒤늦게 적발된 뒤 검찰에 통보되면서 수사를 받게 됐다. 거액의 예상 수익을 날리게 된 D사는 경찰에 진정서를 내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씨티은행은 그해 3월 29일 한미은행 공개매수 승인을 받은 뒤 4월 6일 한미은행 주식을 주당 1만5500원에 매수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주가가 마지노선을 넘지 않았다면 D사는 226억원을 챙길 수도 있었던 셈이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는 7일 주식 시세를 조종한 혐의(구 증권거래법상 시세조종금지의무 위반)로 손모(45) 전 D증권 홍콩법인 상무이사와 전모(46) 전 D사 자금팀장을 불구속기소했다. 검찰은 양 사의 경영진도 조사했으나 6초 단위로 이뤄진 거래에 지시를 내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판단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결국 D증권 측은 D사 측에 한미은행 주식을 되팔지 않게 되면서 217억원 이상의 이익을 본 것으로 조사됐다.

진경준 금융조세조사2부장은 “장외 파생상품에 따른 경제적 이득을 위해 시세를 조종한 사건을 최초로 기소한 사례”라며 “앞으로 금융당국과 함께 선물·파생상품 등과 관련한 시세 조종에 대한 조사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철재 기자

◆콜옵션과 녹아웃옵션=콜(call) 옵션은 주식을 판매한 가격에 되살 수 있는 권리를, 녹아웃(knock-out) 옵션은 주가가 매도했을 때보다 2배를 넘은 상태로 마감되면 콜 옵션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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