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르파, 정상 등반 돕듯 정상회의 길도 닦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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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셰르파(sherpa).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어젠다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자리다. 대통령을 대신해 각국 간에 정상회의 의제를 사전에 조율하는 사전 교섭대표를 말한다. 짐을 지고 히말라야 정상(summit)으로 등산가를 안내하는 셰르파처럼 국가 수반이 참여하는 정상회의(summit)의 길을 닦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림자처럼 정상의 대리인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대통령·총리의 ‘가게무샤(影武者·일본 전국시대에 적을 속이거나 암살에 대비하기 위해 영주로 가장한 대역 무사)’라고 부름직하다. G20 재무장관회의 등 정상회의가 아닌 국제회의에서도 장관을 대신해 의제를 조율하는 대리인(finance deputy)이 있지만 이들을 셰르파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셰르파는 다자간 정상회의와 관련해서만 쓰는 말이다.

이런 관행은 선진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똑똑하고 일 잘하는 관료를 한국에서 흔히 ‘장관감’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G7 외교가에선 될성부른 외교관을 보통 ‘셰르파감’이라고 표현한다. 그 정도로 셰르파는 선진국 외교 모임에선 알아주는 자리다.

2008년 G8 정상회의를 개최한 일본이 아시아 국가인 한국·인도네시아·호주를 초청하면서 한국에도 첫 셰르파가 등장했다. 안호영 외교통상부 통상교섭조정관이 그 역할을 맡았다. 그는 당시 셰르파였던 고노 마사하루 외무성 외무심의관(경제담당 차관보급)에게서 셰르파 업무를 익히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 후 안 조정관은 2008년 10월부터 2009년 10월 말까지 G20 정상회의 셰르파로 일했다. 지금 G20 정상회의 셰르파는 G20 정상회의 준비위원회의 이창용 기획조정단장이 맡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셰르파 바통을 이어받으며 ‘열공 모드’에 돌입한 그는 틈틈이 캐나다·미국·독일·영국·프랑스·중국·일본 등을 잇따라 방문, 해외의 셰르파들과 안면을 트고 있다.

다른 나라 G20 셰르파의 면면도 화려하다. 미국 셰르파인 마이클 프로먼 국가안보부(NSC) 보좌관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하버드 로스쿨 동창이다. 래리 서머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의장의 후임으로 거론될 정도로 오바마의 최측근 실세로 인정받고 있다. 영국 셰르파인 존 컨리프 국제경제 관련 총리 보좌관도 명망이 높다. 프랑스 셰르파인 자비에르 무스카 대통령 경제수석보좌관은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경제관료 출신이다. G20 정상회의 준비위 권해룡 무역·국제협력국장은 “의원내각제 국가의 셰르파는 정상의 외교안보 보좌관(수석)이나 경제수석이 주로 맡고 있다”고 말했다.

정상회의가 끝나면 문서가 남는데, 셰르파는 바로 그 문서 작성을 책임진다. 지난해 9월 G20 피츠버그 정상회의 직전 공동선언문 작성을 위해 각국의 셰르파들이 모여들었다. 금융위기에 대응하는 체제로서 G20이 성공적으로 작동했지만 아직 위험요인이 많이 남아 있다는 메시지를 담기로 하고 문안 작성에 들어갔다.

초안을 본 셰르파 사이에서 “내용이 너무 장밋빛”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안 조정관이 오바마 대통령의 지난해 9월 초 연설의 한 문구를 인용하며 아이디어를 냈다. “경제가 정상화되고 있다는 생각에 안이해져서는 안 된다(A sense of normalcy should not lead to complacency)”는 표현을 집어넣자는 그의 의견에 미국이 반색했음은 물론이다. 당시 많은 외신이 주목했던 공동선언문 전문의 8항은 이렇게 해서 빛을 보게 됐다.

◆특별취재팀=이상렬·권혁주·서경호·최현철·손해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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