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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 아버지 이제 용서합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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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정(情)! 50년간 차곡차곡 쌓였던,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 같던 미움과 원망을 한순간에 녹여준 건 바로 혈육의 정이었다.

'빨갱이 가족' 이라는 감당키 힘든 멍에를 씌웠던 월북자 아버지를 상봉한 趙경제(52.무역업)씨. 그는 17일 "이제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다" 고 말했다.

趙씨의 아버지 조용관(趙鏞官.78)박사는 북한 최고의 방직 기술전문가로 '공훈과학자' 칭호까지 받은 인물. 방직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인 그는 경제씨가 두살, 여동생 경희(50)씨가 태어난 1950년 돌연 월북했다.

그때부터 趙씨에게는 월북자 가족으로서의 맵고 지독한 세상살이가 시작됐다.

"홀로 남아 어떻게든 자식들을 잘 키워보려고 억척스럽게 사시는 어머니 모습을 볼 때마다 미칠 것 같았습니다. 학교에 가면 '빨갱이 자식' 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까 두려워 말 한마디 못하고 지냈지요. 한때 자폐증까지 나타났습니다."

법에도 없는 '연좌제(連坐制)' 는 그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커다란 벽이었다.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하려 했지만 "집안 배경 때문에 어림도 없다" 는 친척들의 만류로 서울대 법대로 진로를 바꾸었다.

하지만 졸업 후에도 공직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수사기관에서는 잊을 만하면 한번씩 찾아와 마음의 상처를 덧냈고, 대기업 취업 후에도 가족내력이 밝혀질까봐 가슴을 졸여야 했다.

그는 결국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94년 호주로 이민을 갔다. 여동생 경희씨는 趙씨보다 앞서 84년에 이미 호주로 떠났다.

그는 "월북자 가족으로 겪은 고통을 자식들에게는 물려주지 않겠다는 생각에 이민을 결심했다" 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지면에 실린 상봉자 명단에서 아버지 이름을 보는 순간 과거는 모두 백지가 됐다. 그는 결국 동생과 함께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상봉장에서 아버지를 맞닥뜨렸을 때 아들의 호흡이 멎는 것 같았다.

"아버지."

"미안하다…고생 많았지. 다 내 잘못이다."

"아니에요…살아계시니 그걸로 됐어요."

趙박사는 "어디 하나 빠진 구석이 없는 아이들이 나 때문에 불이익을 당해 가슴이 아프다" 며 "빨리 통일이 돼 평양으로 아이들을 부르고 싶다" 고 말했다.

딸에게 금반지를, 아들에게 만년필을 건네준 趙박사는 떠나기 전날 마지막 개별 상봉에서 "다시 만나자. 빨리 만나자" 는 말을 수십번 되뇌었다.

"아버지를 곁에 모실 수 있다는 삶의 목표가 새로 생겼습니다. 혹시 호주로 모실 수 있는지 알아보았는데 제가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 별 문제는 없다고 하더군요."

과연 趙씨 가족은 머나먼 이국에서 함께 살 수 있게 될 것인가.

기선민.박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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