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 "조선족사회 붕괴위기 정부 대책 마련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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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최근 학생 30여명과 중국 옌볜(延邊)의 조선족 마을로 농활을 가기 위해 선양(瀋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그때 내 옆 자리에는 한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는데 옷차림이나 말투에서 그녀가 한국사람이 아님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 입국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아주머니가 꺼낸 여권은 한국여권이었다.

연유를 물으니 아주머니는 자신이 중국에 남아있는 병든 남편과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한국에서 위장결혼을 한 조선족이라고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마치 조선족 사회에 불고 있는 한국열풍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농활을 하기로 한 옌지(延吉)시 근처의 한 조선족 마을에 도착하니 그야말로 마을 전체가 한국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젊은이들의 3분의1이 한국으로 빠져나간 데다 3분의1은 중국 대처(大處)로 빠져나가 마을에는 노인과 부녀자.어린이만 남아 있었다.

붕괴돼 가는 조선족 사회를 그대로 반영하는 듯했다.

동포들의 대거 이탈은 조선족 농촌의 공동화(空洞化)현상을 초래했고, 이는 출산율 저하와 인구감소로 인한 가정과 교육의 붕괴로 이어졌다.

한국병이 시작된 1990년부터 조선족 인구는 해마다 줄어들어 2백만명이 넘던 인구가 1백90여만명으로 줄어들었고 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조선족 인구비율도 50%아래로 떨어져 자치주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다.

이미 조선족 학교의 폐교율은 50%에 이른다고 한 동포 교수가 푸념했다.

심지어 이제는 조선족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까지 한국행에 나서고 있다고 한다.

중학교 교장선생님.당 서기.초등학교 교사.지방공무원 등 할 것 없이 한국행이 꿈이며 우리 돈으로 약 1천만원의 입국수속비 마련이 목표라는 것이다.

한국에 가기만 하면 목돈을 거머쥘 수 있다고 믿는 동포들에게 한국에서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돈을 번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설득해 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남북간의 화해와 교류가 목전에 다가온 마당에 황폐해가는 조선족 사회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될 것 같다.그들이 원하는 것은 '쟁재한국(在韓國)화재중국(花在中國)' , 즉 한국에서 벌어 중국에서 쓰겠다는 것이다.

이들을 모두 한국화하지 못한다면 최소한 중국의 공민으로서 한민족 공동체를 만들어 가면서 살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해줘야 한다.

그러려면 불합리한 산업연수생 선발제도나 투명하지 않은 수속비 과다부과, 자의적 판단에 의한 비자발급 등을 개선해야 한다.현재 조선족의 고국방문에 관한 규정은 크게 완화돼 담당영사의 재량으로 비자를 발급할 수 있다.

그렇게 들어온 대부분의 조선족들은 불법체류자로 국내에 남아 있는 실정이다.

이들에게 단기 취업비자나 노동허가증을 발급하는 대신 체류조건을 강화해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론 결코 한국에서 거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시켜줘야 한다.그러잖으면 조선족의 맹목적 한국행이나 이에 따른 조선족 사회의 황폐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금희연·서울시립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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