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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③ 이상한 명령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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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50년 10월 북한을 지원하기 위한 중공군 병력이 군악대의 연주 속에 압록강을 줄지어 건너고 있다. 약 30만 명의 중공군이 그해 10월 중순쯤 한반도로 잠입했다. [중앙포토]

군인은 명령에 따라 살고 죽는다. 국가의 안전을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내려진
명령에 따라 작전을 수행한다. 살고 죽는 것은 그다음의 문제다. 때로 이해하기 힘든 명령도 있긴 하다.

평안북도 운산에서 심상찮은 조짐이 나타나고, 뒤 이어 중공군이 여기저기서 출몰하면서 대규모 공세를 예고할 즈음이었다. 이때 내게 명령이 하나 내려왔다. 지금 입장에서 보면 이상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당시 최전선엔 위기의 조짐이 분명히 보이고 있었다. 10월 24일 첫 중공군 포로가 잡혔고, 수색을 나갔던 미군 전차가 적의 피로 시뻘겋게 변한 채 돌아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는 돌연 2군단장에 임명됐다.

2군단 사령부는 1사단 사령부가 있던 평북 영변에서 평안남북도의 경계인 청천강을 건너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평안남도 개천군 군우리였다. 1사단장에서 2군단장으로 영전한 셈이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무거운 불안감이 짓눌렀다. 그러나 명령은 명령이었다. 유재흥 2군단장은 육군참모본부 차장으로 발령이 나 서울로 가버리고, 내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2군단에 부임한 나는 곧바로 상황을 점검했다. 1사단의 동쪽에서 나란히 북진하던 2군단도 상황이 급박했다. 2군단 참모장 이한림 준장과 작전참모 이주일 대령은 전방에 중공군 대군이 출현했다고 보고했다.

우선 6사단이 문제였다. 6사단은 6·25 개전 초 춘천에서 적의 발목을 잡은 덕분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추가 남하를 사흘 동안 지연하는 데 성공해 유엔군이 개입할 시간을 벌어줬던 역전의 부대다. 북진에 나선 6사단은 최종 공격 목표 지역인 압록강 초산에 거의 접근했지만, 이제 중공군 병력에 의해 포위된 상태에서 힘겨운 전투를 막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김종오 6사단장은 내가 군단장으로 부임하기 직전 차량 사고로 턱을 크게 다쳐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로 후송됐다.

1950년 10월 말 압록강변 초산에 도착한 국군 6사단 7연대 병사가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고 있다. [중앙포토]

6사단 7연대(연대장 임부택 대령)는 전체 사단 병력 가운데 최선봉을 담당했다. 7연대는 영월 지역 광공업 회사들이 보유했던 각종 차량 100여 대를 확보하고 있어 그만큼 기동력이 좋았다. 북진 과정에서도 이들은 뛰어난 기동력으로 압록강에 선착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이른바 ‘압록강 물 먼저 뜨기 작전’을 벌였던 것이다. 압록강에 가장 먼저 도착해 남북 통일을 상징하는 ‘물 뜨기’ 임무를 완수하는 것은 국군 지휘관 누구라도 얻고 싶은 영예였다. 그러나 7연대는 지나치게 서둘렀다. 다른 부대와 고립된 채로 진격하던 이들은 군단 사령부로 다급하게 무전을 때렸다. “탄약과 보급품이 바닥났다. 급히 공수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6사단 2연대(연대장 함병선 대령)도 중공군의 포위로 산중에 갇혀 버렸다. 급했다. 일단 이들에게 탄약과 보급품을 공수해줬다. 군단에 나와 있던 미 공군 연락 장교를 통해서였다. 2군단 예하 8사단도 중공군의 공세에 기가 꺾여 있었다. 이성규 8사단장은 “중공군 출현으로 부대원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상한 일은 서울로 떠났던 유재흥 장군이 사흘 만에 군우리의 2군단 사령부에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다. 유 장군은 대뜸 “다시 돌아가라고 그러네”라고 말했다. 원대복귀를 뜻하는 말이었다. 유 장군이 다시 2군단장을 맡았고, 나는 다시 청천강을 건너 1사단장으로 복귀했다. 급박한 전선에 있는 장수를 상대로 왜 그렇게 황당한 인사명령과 번복이 이뤄졌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추측하건대 첫 인사명령이 떨어지자 이 지역 담당 프랭크 밀번 미 1군단장이 급박한 전선 상황을 걱정해 한국군 측에 인사명령을 재고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10월 29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신성모 국방장관과 정일권 참모총장을 대동하고 평양을 방문했다. 1사단장으로 복귀한 나는 상황을 정리하느라 이 대통령을 영접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평양에서 10만 군중을 상대로 감동적인 연설을 한 뒤 떠날 때는 내 지프로 비행장까지 모셨다. 이 대통령이 탑승한 미군 C-47 수송기에는 태극기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에 대한 당연한 의전이었다.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는 이 대통령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는 급히 1사단 사령부로 되돌아갔다.

운산에서는 드디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주 심각한 상황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나는 지프를 몰아 영변의 1사단 사령부를 거쳐 운산으로 향했다. 구룡강의 굽이가 여러 개 겹쳐져 구불구불한 협곡을 형성하고 있던 이른바 ‘낙타머리 길’의 초입에 들어설 때였다. 나는 그곳에서 중공군의 총구에 직면했다.

백선엽 장군



[전쟁사 돋보기] C-47

2차대전 활약 미군 수송기
평양수복 때 이승만 타고 가

국군의 평양 수복 행사에 가기 위해 1950년 10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이 탔던 C-47 스카이트레인(Skytrain: 하늘의 열차)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많은 활약을 했던 수송기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와 미국의 유럽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장 등 연합국 지도자들도 자주 이용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태평양전쟁 때 C-47을 타고 뉴기니와 버마 등 동남아 지역을 날아다녔다. 미국 더글러스 항공사가 생산한 C-47은 41년 12월 처음 비행한 뒤 모두 1만 대 이상이 생산됐다. 28명의 중무장 병력을 태울 수 있어 병력 수송에도 활용됐다. 기내에 의료장비를 갖추고 세 명의 의료진과 14명의 부상병을 수송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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