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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연구비 흥청망청] 돈타는 연구만…실적은 엉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국가연구개발 사업이 곳곳에서 파행을 겪고 있다.

매년 국가 예산에서 3조5천억원 이상 나가는 연구비를 놓고 '먹는 사람이 임자' 라는 말이 나돌 정도다. 연구비를 어떻게 쓰는지, 연구를 제대로 하는지 사후관리가 소홀하기 때문이다.

일단 연구비를 타내면 연구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책임은 뒷전에 둔 채 연구비를 더 얻기 위해 또다른 연구계획서를 작성하는 연구소도 늘고 있다.

이에 따라 뜻있는 연구원의 좌절감이 쌓이고 있고, 과학기술 수준은 제자리 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 연구비 샌다〓H기업 부설연구소 朴모(32)씨는 "지난달 소장이 술값.식비 등 개인적으로 쓴 2천만원을 메우기 위해 국가연구개발 사업관련 출장비 영수증을 가짜로 만들었다" 며 "부정에 환멸을 느껴 벤처로 옮길 예정" 이라고 말했다.

그는 "2~3명이 하는 연구를 7~8명이 하는 것처럼 연구계획서를 허위로 작성해 인건비를 더 타내는 경우도 있다" 고 덧붙였다.

반부패국민연대 고상만 국장은 "국민 세금을 함부로 쓰는데 대한 자괴감을 토로하는 연구원들의 제보전화가 종종 걸려온다" 며, 이들의 제보에 따르면 "대학이나 연구소 주변 고급 술집에서 법인카드를 내밀면 금액을 10만원 이하로 쪼개 일반음식점 영수증으로 만들어주는 일이 일상화해 있다" 고 말했다.

◇ 중복해서 연구비 탄다〓의료연구 명목으로 산업자원부 연구비를 타낸 H연구소는 비슷한 연구과제를 과기부에도 냈다.

신약개발의 경우 연구계획서만 조금씩 다르게 만들면 과기부.산자부.보건복지부 등에서 돈을 타낼 수 있다.

비슷한 연구를 두세개 연구소가 겹치기로 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과학기술평가원의 환경기반기술개발과 국립환경연구원의 환경기술개발이 비슷해 통합이 필요하다는 게 과기부 분석이다.

◇ 대필(代筆).로비 판친다〓정보통신 벤처 朴모(37)사장은 국가 연구비를 타내기 위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다니는 후배에게 연구계획서 대필을 부탁했다.

朴사장은 "후배가 아는 연구원들의 이름을 집어넣고, 사업내용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1억원의 연구비를 손쉽게 받을 수 있었다" 며 "이미 개발된 연구과제를 다시 포장해 연구비를 받아주는 대필 전문가도 있다" 고 밝혔다.

연구비를 알선해주고 리베이트로 5~10%를 받는 브로커도 등장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연구소나 언론계 출신이 브로커로 활동하고 있다" 고 귀띔했다.

과학기술평가원 등의 인터넷 게시판에는 "선정과제가 미리 정해져 있는데, 괜히 신청했다가 들러리만 섰다" 는 불만이 올라오고 있다.

◇ 낮잠자는 고가(高價)장비〓기획예산처가 지난해 가을 연구비 실사를 벌인 결과 E연구소는 세계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프레온 냉매가스장비를 구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W병원은 1억6천만원에 도입한 레이저안측정기를 사용하지 않다가 지적을 받은 뒤 다시 활용하고 있다. K연구원은 구입 장비를 교수 개인장비로 사용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 선정.사후감독 엉성〓한 연구개발 사업의 경우 평가위원 11명이 1년에 두번 만나 7백여건의 과제를 선정하고 있다.

선정에 참여했던 전국경제인연합회 정진호 박사는 "평가위원회는 통과의례라는 느낌을 받았다" 고 말했다.

사후 감독도 문제가 많다. 산자부 산업기반사업 1천41개 연구과제를 감독하는 산업기술평가원의 심사인력은 40명선. 평가원 관계자는 "1년 단위로 평가하지만 최근 과제가 많아져 서류 심사를 주로 하고, 현장 실사는 꼭 필요한 경우만 한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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