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현대의 '보리밭 경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현대 사태가 다섯달째 계속되고 있다. 지난 3월 정몽구.몽헌 회장 형제간 다툼 이후 현대투신.건설의 자금난, 현대차의 계열분리 지연, 현대중공업.전자간 소송 등 바람 잘 날이 없다.

당장 고통을 받는 쪽은 현대 직원이다. 현대맨들은 "국내 최고.최대 기업이란 자부심을 버린 지 오래" 라고 푸념한다. 우리사주로 산 주식 값이 떨어지자 집에선 부부싸움 나지, 밖에선 인사 받기가 겁날 정도라는 것이다.

현대 식구들만 괴로운 게 아니다. 현대 자금난이 불거졌을 때 한 중소 협력업체 사장이 신문사로 전화했다. "본사에서 '납품가를 3월부터 소급해 10% 내릴 테니 사인하라' 고 팩스를 보냈다" 며 "분통이 터지지만 그래도 현대가 어려워지면 협력업체부터 죽으니 현대에 나쁜 기사는 쓰지 말라" 고 호소했다.

현대와 자금거래를 꺼리는 금융기관들은 요즘 정부로부터 '이기주의자' 로 몰린다. 그러나 이들의 속은 더 탄다. 한 증권사 임원은 "현대 회사채만 봐도 머리가 아프다" 며 "현대가 잘못되면 대우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파장이 클 것" 이라고 말했다.

해외에서 HYUNDAI 차를 타며 뿌듯했던 한국인도, 주가가 떨어져 우울한 투자자도 속상하긴 마찬가지다. 나라 경제가 현대 때문에 삼복더위 속 홍역을 치르고 있다.

현대는 문제가 계속 터지는데도 갈팡질팡하면서 시장의 신뢰를 잃고 있다. 증시는 주가로 평가하고, 금융기관들은 거래를 꺼리는 것으로 반응하고 있다. 은행들은 마지못해 현대의 대출금을 만기연장해 주고 있지만, 제2금융권은 현대가 발행한 회사채나 기업어음을 거의 사주지 않는다.

정부와 채권은행이 "현대는 대우와 다르다" 고 아무리 외쳐도 증권.종금사들은 떼이면 어떡하느냐는 생각이다. 시장은 이처럼 냉정하다.

결합재무제표를 보면 현대그룹은 장사해서 번 돈으로는 이자도 못 갚는다. 그렇다면 모든 계열사와 사업을 끌어안고 가기 어렵다.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서산농장을 "혼(魂)으로 아버님을 만나는 성지 같은 곳" 이라며 애지중지해왔다. 그러나 필요하면 이 농장도 팔아야 한다.

현대 하면 떠오르는 게 불도저다. 鄭전명예회장은 자서전 '이땅에 태어나서' 에서 "한국전쟁 때 한겨울에 유엔군 묘지 단장하는 일을 맡자 보리밭의 보리를 떠다가 푸른 색으로 덮었다" 고 적었다.

1970년 현대는 경부고속도로의 5분의2를 맡아 2년여 만에 공사를 끝냈다. 싼 값을 써내 일단 공사를 따낸 뒤 공기를 최대한 줄여 손익을 맞추는 전략이었다. 이 도로는 그러나 그 뒤 개.보수 비용이 건설비를 넘어설 정도로 더 들었다.

2000년 6월 현대는 자동차 분리가 벽에 부닥치자 역(逆)계열 분리라는 '꼼수' 를 들고 나왔다가 퇴짜맞았다. 자동차 소그룹(6개사)대신 몸통인 현대건설.상선 등(25개사)을 분리하겠다는 것이었다. 50년 전 '보리밭' 방식을 연상케한다. 재계에선 현대 사태의 본질을 "변화에 게을렀기 때문" 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시장에 고통을 주면 바로 그 시장에서 고통을 당하게 마련이다. 현대전자를 상대로 한 현대중공업의 소송은 사외이사들이 주도했다. 현대중공업에 투자한 소액주주들도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 중이다. 세상은 이렇게 빨리 변하고 있다. 잔디를 구하기 어려우면 묘소를 줄이거나 사업을 맡지 말아야지 언제까지나 보리로 눈가림할 수는 없지 않은가.

민병관 산업부 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