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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식장의 장제스, 경쟁자 리쭝런을 바보로 만들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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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1948년 5월 20일 난징의 국민대회당에서 거행된 정·부총통 취임식. 리쭝런(뒷줄 군복 입은 사람)은 후일 “이날 나는 장제스의 노리개였다”고 회고했다. 김명호 제공


1965년 7월 20일 오전 10시40분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를 태우고 상하이를 떠난 전용기가 베이징 서우두(首都)공항에 착륙했다. 전인대·전국정협·국방위원회·민주당파·전국공상연합 등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공항에 나와 있었다. 이들은 저우언라이보다 20분 늦게 상하이를 이륙한 비행기에서 내릴 사람을 기다렸다. 다음날 신화통신을 비롯한 전국의 언론매체는 “항일전쟁 초기 타이얼좡(台兒庄) 전역에서 일본군 2만여 명을 몰살시킨 민족영웅이며 국민정부 부총통과 총통대리였던 리쭝런(李宗仁)이 귀환했다”는 기사를 대문짝만 하게 보도했다. “전 총통대리라니, 이건 또 뭐야.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내뺀 지가 언젠데…”라며 혼자 웅얼거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16년 전 중국을 떠났던 리쭝런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핵실험 성공에 버금가는 대형사건이었다.

1948년 4월 헌법에 의해 처음 실시된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서 장제스는 국민대회 대표 3045명 중 2430명의 지지를 받았다. 부총통은 국부 쑨원(孫文)의 장남인 국민정부 부주석 쑨커(孫科), 국민당 베이핑(北平)행원(行轅) 주임 리쭝런, 우한(武漢)행원 주임 청첸(程<6FF3>) 간의 3파전이었다. 당내 불만세력과 미국의 지지를 받던 리쭝런은 법정 득표수 미달로 탈락한 청첸과의 제휴에 성공했다. 결선 투표에서 장제스가 밀던 쑨커를 143표 차로 눌러버렸다.

리쭝런은 34세인 1925년 광시(廣西)성에 난립하던 잡군들을 일거에 제압한 신(新)광시군벌(桂派)의 영수로 별명이 ‘광시의 왕(廣西王)’이었다. 이듬해 5월 광저우에서 황포군관학교 교장이던 장제스를 만나면서 지겨운 인연이 시작됐다. 북벌과 항일전쟁을 함께 치르며 대립과 합작을 반복했다. 두 사람은 20여 년간 서로를 위협하는 가장 큰 경쟁자였다.

총통 장제스는 부총통 리쭝런을 고약하게 대했다. 못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5월 20일 리쭝런은 장제스와 함께 정식으로 취임선서를 했다. 리는 장의 시종실에 취임식 날 복장을 문의했지만 확실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당일 새벽에서야 군복을 착용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군복에 훈장을 덕지덕지 달고 나온 리쭝런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부총통은커녕 시종무관이나 경호 책임자 같아 참석자들을 난감하게 했다. 장제스를 비롯한 고관과 초청받은 인사 거의가 중국식 정장 차림이었다. 장제스는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리쭝런의 최측근이었던 국방부장을 의논 한마디 없이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 버렸다.

두 사람은 매주 두세 차례 공식적인 단독 면담을 했다. 장제스는 정국에 관한 얘기를 단 한마디도 꺼내는 법이 없었다. 날씨와 음식에 관한 얘기만 해댔다. 리쭝런이 정책 건의를 위해 면담을 요청하면 거절했다. 당당하게 투표로 선출된 부총통이었지만 후일 “세상에 태어난 이래 가장 한가한 나날들이었다. 군국대사에 관한 회의가 열려도 내게 알리지 않았고 국빈이나 외교사절들에게 베푸는 연회에도 오라는 말이 없었다. 가끔 참석하라고 해서 가보면 국민당 원로들에게 베푸는 만찬자리였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장제스의 비행기 선물은 절정이었다. “부총통이니 전용기가 있어야 한다. 놀러 다닐 때 이용해라”면서 자신의 전용기 ‘미령호(美齡號)’를 선사했다. 바람 불고 천둥번개가 요란한 날이면 영락없이 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행기 타고 항저우나 상하이에 놀러가지 왜 답답하게 공관에만 틀어박혀 있느냐”며 짜증을 냈다.

이듬해 1월 국공내전에서 패배가 확실시된 장제스를 리쭝런은 몰아붙였다. 장제스는 국민당 총재직을 유지한 채 총통직에서 하야했다. 헌법에 의해 대리총통에 취임한 리쭝런은 공산당 측에 회담을 제의했다. 베이핑에서 평화회담이 열렸다. 리쭝런은 장제스의 직계인 중앙군과 함께 국민당군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계파(桂派)’의 영수였지만 승기를 잡은 인민해방군이나 장제스의 적수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회담은 파열될 수밖에 없었다. 회담에 참석한 국민당 측 대표 중 일부는 아예 베이핑에서 공산당 측에 가담해 버리는 촌극을 연출했다.

두 사람은 제 갈 길을 갔다.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가고, 리쭝런은 함께 가자는 장을 뿌리치고 미국행을 택했다. 타이베이에서 군복을 입고 총통에 복귀한 장제스는 부총통 리쭝런의 귀국을 종용했다. 거절당하자 절차를 거쳐 리를 파면시켰다.
리쭝런은 베이징 도착 성명에서 장제스를 비난하지 않았다. 소식을 접한 장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남들이 “나이가 들더니 드디어 돌았다”고 하면 고개만 끄덕거리는 정도였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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