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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Knowledge <117> ‘겨울의 술’ 보드카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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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4면

유철종 기자

주류 전문 업체들에 의해 국내에도 소개된 러시아산 보드카 ‘스톨리치나야’. 북방의 혹한을 견디고 자라는 겨울 밀과 순수한 물로 만드는 이 보드카는 한때 러시아에서 보드카의 대명사로 알려질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최근에는 ‘루스키 스탄다르트’란 제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중앙포토]

주기율표 만든 화학자 멘델레예프 가라사대 “보드카는 40도가 딱”

보드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가 러시아입니다. 위스키 하면 스코틀랜드, 맥주 하면 독일, 와인 하면 프랑스가 연상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스톨리치나야’ ‘루스키 스탄다르트’ ‘돌고 루키’ ‘벨루가’ 등의 상표가 붙은 러시아산 보드카를 한번쯤은 보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물론 러시아에서만 보드카가 생산되는 건 아닙니다. 스웨덴·핀란드 등의 북유럽 국가와 폴란드·우크라이나 같은 동유럽 국가는 물론이고 중앙아시아나 몽골·미국 등에서도 보드카가 만들어지고 널리 애용됩니다. 한국의 호텔 바나 주류 전문 매장 등에서 흔히 보게 되는 ‘압솔루트(Absolut)’ ‘핀란디아(Finlandia)’ ‘스미르노프(Smirnoff)’는 각각 스웨덴·핀란드·미국산 보드카입니다.

북유럽 국가들과 폴란드는 모두 자국산 보드카가 원조이며 최고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몽골은 말 젖으로 만든 이색 보드카를 최고라고 자랑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보드카는 러시아산’이라는 주장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러시아에 ‘보드카’란 이름 처음 퍼진 건 18세기

러시아에서 보드카가 본격적으로 제조되기 시작한 건 15세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14세기 초 프랑스에서 개발된 증류 기술이 러시아에 소개된 이후입니다. 하지만 곡물을 발효시킨 뒤 증류해 만든 술에 ‘보드카’란 이름이 붙고 대중적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한 건 제정 시절인 18세기입니다.

보드카(vodka)란 명칭은 러시아어의 ‘물(voda)’이란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물처럼 투명하고 깨끗한 술이란 뜻에서 비롯된 듯합니다. 어떤 이는 이 명칭이 위스키와 어원이 같은 라틴어 ‘aqua vitae(생명의 물)’에서 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찌 됐건 물이란 뜻이 포함된 보드카란 이름은 이 술의 특징인 ‘무색·무취·무미’와 깊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보드카엔 같은 증류주인 위스키나 코냑이 갖고 있는 독특한 색과 향이 없습니다. 진짜 애주가는 바로 이 깨끗함 때문에 보드카를 찾는다고 합니다. 보드카가 각종 칵테일의 베이스 재료로 쓰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맛이나 색·향을 보태지 않고 순수한 알코올 성분만 더해주기 때문이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칵테일 ‘스크루 드라이버’는 보드카에 오렌지 주스를, ‘블러디 메리’는 토마토 주스를 탄 것입니다.

원료는 위스키와 비슷하지만 제조법 달라

보드카의 원료는 밀·보리·감자 등으로 위스키와 비슷합니다. 이 원료를 찌고 엿기름과 효모를 섞어 발효시킨 원액을 여러 단계에 걸쳐 증류하고 자작나무 숯 등에 통과시키며 정제합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95~96%의 주정을 물로 희석시키면 우리가 흔히 마시는 40%대의 보드카가 됩니다. 위스키는 마지막 제조 단계가 보드카와 다릅니다. 주정을 나무통에 넣고 오랜 기간 숙성시켜 고유의 맛과 향을 얻습니다. 이것이 위스키입니다.

보드카의 도수는 보통 40~50도 사이를 오갑니다. 물론 이보다 더 약하거나 독한 보드카도 있습니다. 특히 밀주는 90도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공식 보드카는 대부분이 40도짜리입니다. 여기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40도 보드카가 몸에 가장 잘 흡수되고, 해(害)도 적으며 최상의 술 맛을 낸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됐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발견’을 한 사람은 바로 19세기 러시아의 유명한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입니다. 고등학교 화학시간에 우리를 괴롭히던 복잡한 원소 주기율표를 만든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1865년 31세의 나이에 쓴 박사논문 ‘알코올과 물의 합성에 관하여’에서 40도가 가장 이상적인 보드카 도수임을 밝혀냈습니다. 알코올 원액과 물의 혼합 비율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였습니다. 이후 제정 러시아 정부는 1894년 공식 보드카의 도수를 40도로 못박았습니다. 이 전통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왼쪽부터 최근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루스키 스탄다르트’, 모스크바 창건자 이름을 딴 ‘유리 돌고루키’, 러시아 실세 총리 블라디미르 푸틴의 이름을 딴 ‘푸틴카’, ‘스타라야 모스크바’, ‘프라즈드니치나야’와 스웨덴 보드카 ‘압솔루트’.

‘보드카 매니어’ 옐친, 술 취해 여러 번 해프닝

러시아 사람들의 보드카에 대한 ‘애정’은 경탄을 자아냅니다. 정말 많이 마십니다. 그래서 술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인식도 상당히 관대한 편입니다. 웬만큼 취하고 추태를 보이는 것은 너그러이 용서됩니다. 국가 수반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러시아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2007년 타계)은 대단한 술꾼입니다.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심지어 술에 취해 정상회담까지 펑크 낸 일도 있습니다. 대통령 재임 중이던 1994년 9월 옐친은 미·러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아일랜드에 들렀습니다. 샤논 공항에서 앨버트 레이놀즈 아일랜드 총리와 회담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비행기 안에서 수행원들과 보드카를 너무 마시는 바람에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옐친 보좌관들은 영문도 모른 채 한 시간 이상을 밖에서 기다리던 아앨랜드 총리 부부에게 뒤늦게 “대통령이 몸이 좋지 않아 비행기에서 내릴 수 없다”고 해명했습니다.

같은 해 8월 독일을 방문했을 때도 술에 취해 추태를 부렸습니다. 베를린시의 야외광장에서 오찬을 겸한 환영 연주회가 열리던 도중 러시아 민요가 나오자 갑자기 무대로 뛰어 올라가 지휘자의 지휘봉을 뺏은 뒤 직접 흔들어 대기 시작한 겁니다. 이 광경은 그대로 독일 TV에 생방송됐고 언론은 ‘술 탓’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한국 같으면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았을 대통령의 이런 ‘술 주정’을 러시아 국민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술을 마시면 실수를 좀 할 수도 있지’ 하는 식의 정서가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보드카 제대로 마시는 법

냉동실 넣어 차게 해야 제맛
안주로 삼겹살도 잘 어울려

오이 피클과 절인 버섯, 토마토, 샐러드 등을 모은 보드카 안주.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보드카 마시는 법에 대해 한번 알아볼까요. 어떤 전문가들은 보드카는 섭씨 8~10도 정도일 때 마시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합니다. 상온에서 그냥 마시면 알코올의 역한 기운이 느껴질 수 있고, 너무 차게하면 보드카 상표마다 고유한 맛의 차이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랍니다. 반면 또 다른 전문가들은 술병에 성에가 낄 정도로 꽝꽝 얼려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앞의 얘기는 ‘달인’ 수준에 이른 애주가들이 하는 것이고 보통 사람들은 후자의 방법이 무난한 것 같습니다.

보드카 병을 냉동실에 넣어두면 술이 얼지 않고 겔(gel) 상태의 걸죽한 액체로 변합니다(혹 이렇게 해서 어는 술이 있다면 그건 불순물이 들어간 가짜 술일 확률이 높습니다). 바짝 얼린 보드카는 잔에 따를 때도 마치 꿀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가느다란 줄기가 되어 내려옵니다. 이렇게 얼린 보드카를 단숨에 목 깊숙이 던져 넣어 보십시오. 얼음처럼 찬 기운이 식도를 타고 서서히 내려가다 어느 순간 불꽃이 터지는 듯한 열기를 내뿜을 겁니다. 곧이어 온몸에 퍼져가는 짜릿한 전율을 느끼시게 될 겁니다. 속이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느낌도 받으실 겁니다. 이것이 바로 보드카를 마시는 맛입니다. 바깥 기온이 섭씨 영하 10~20도까지 떨어지고 눈이라도 쏟아지는 날이면 술 맛이 한층 살아납니다. 우리나라에선 그래서 겨울이 보드카를 마시기에 적당한 계절입니다.

아무리 보드카 맛이 매력적이라고 맨 술만 들이키면 곧 위장에 탈이 나고 말겠죠. 적당한 안주를 곁들여야 합니다. 보드카의 맛을 돋우는 최고의 안주론 삭힌 청어(러시아 말로 ‘셀료트카’)나 철갑상어 알(캐비아)이 꼽힙니다. 하지만 한국에선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굳이 무리를 한다면 캐비아는 고급 호텔 같은 데서 판매하니 맛볼 수는 있겠지만 값이 만만찮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안주론 오이를 소금에 절인 피클, 절인 버섯, 토마토 등이 있습니다. 특히 피클 국물은 보드카를 마신 뒤 해장하는데 최고입니다. 고기 종류론 삼겹살도 잘 어울립니다. 서울에서 제대로 된 안주로 보드카를 맛보고 싶으시다면 동대문 일대에 있는 러시아 식당들을 찾아가 보길 권합니다.


뉴스 클립에 나온 내용은 조인스닷컴(www.joins.com)과 위키(wiki) 기반의 온라인 백과사전 ‘오픈토리’(www.opentory.com)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궁금한 점 있으세요? e-메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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