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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민주화 경험이 남북 격차 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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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4·19 혁명 직후 환호하는 시민들. 4·19는 일회적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우리 사회 민주화의 추동력을 끊임없이 제공했다. 4·19 50주년을 맞는 2010년 벽두,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새로운 화두로 제기되고 있다. [중앙포토]

1960년 4·19 혁명은 우리 민주주의의 출발점이었다. 5·16쿠데타 이후 군부 권위주의 정권을 거치는 동안 우리 사회 민주화의 추동력을 제공했고, 마침내 87년 6월항쟁으로 그 결실을 맺었다.

4월 혁명의 정신은 자유민주주의를 제대로 구현해 보자는 것이었다. 직접 계기는 3·15 부정선거가 제공했다. 민주주의 원칙 파괴에 학생들은 격분했고, 훼손된 원칙을 회복하고자 거리로 나섰다. 대한민국이 세워진 지 불과 12년 만에 벌어진, 민주주의 학습 효과가 매우 빠른 실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당시만 해도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유일한 집단이었던 대학생, 고등학생이 중심이 됐다. 그들은 선언문 하나만 발표하고 시위에 나섰다. 시위를 리드한 어떠한 혁명군 조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선언문의 골자가 바로 민주주의 원칙 훼손에 대한 분노 그 이상이 아니었다. 4·19 이후 일시 무정부 상태가 되자 대학생들이 자치대를 만들어 거리 청소에 나서며 질서를 잡아나간 일은 그 같은 특징을 잘 보여준다.

◆북한에는 없는 ‘시민의 힘’=4·19는 종종 한계가 많은 운동으로 폄하되곤 했다. 5·16쿠데타로 4·19정신이 좌절된 데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론 급진적 민중혁명을 꿈꾸는 시각에서 수준 낮은 단계로 규정하기도 했다.

또 4·19의 의미 자체를 평가절하하려는 경우도 있었다. 이제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 구도가 해체된 오늘의 시점에서 더 이상 냉전 시대의 눈으로 4·19를 재단하는 관점은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국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경험 그 자체가 대단한 위업이었다. 민주주의 이행 과정에서 보편적으로 치르는 희생이 적었던 점도 새롭게 평가받아야 한다. 우리는 ‘저비용 명예혁명’의 모범을 보였다.

4·19를 한반도 차원으로 넓혀 생각해 보면 그 의미가 확연히 달라진다. 해방 이후 남북한에 각기 단독 정부가 들어서는 과정은 비슷했다.

하지만 북한에는 4·19와 같은 ‘시민의 힘’에 대한 경험이 없다. 6·25전쟁 이후 김일성 권력의 무한 강화로 치달으면서 ‘가족 정권’으로까지 변질됐다. 홍석률(성신여대·한국 현대사) 교수는 “4·19와 같은 민주주의 경험의 차이가 남북한 격차로 이어졌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며 “4·19를 통해 분출한 한국 민족주의가 5·16 이후 경제개발의 원동력으로 작용한 점도 새롭게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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