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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년 특별시론

국격과 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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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국격(國格)을 높이기 위하여는 법과 원칙의 확립이 필요하다는 말이 자주 거론되고 있다. 새해에 예정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법치주의의 정착은 우리 사회의 해묵은 과제이자 정부의 주요 시정 방침의 하나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지난해 촛불시위와 철도노조의 파업, 국회의 파행(跛行) 운영 등을 겪어본 정부는 사회 각 분야에서 법의 원칙과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나라의 격마저 떨어졌음을 개탄하고, 대다수 국민도 우리 사회가 선진화하자면 어떻든 떼법, 무법(無法)이 무작정 방임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 관하여는 공감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 사회에서 법치주의의 확립이 긴요한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정부와 시민사회 사이에는 상당한 인식의 차이가 느껴지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원래 법치주의가 국가권력의 행사를 국민의 대표인 국회에서 제정한 법률에 의하게 함으로써 국민의 자유와 재산을 지키기 위한 필요성에서 출발하였다는 생각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선거라는 과정을 통하여 이미 다스리는 자(治者)와 다스림을 받는 자(被治者)의 동질성이 인정되는 현대 민주사회에서의 법치주의란 과거와 같은 단순한 방어적 차원을 넘어 정부와 국민이 합의·의논에 의하여 행동조정을 해가는 하나의 절차적 틀로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본다면 정부가 법치주의를 강조하고 그것이 우리 사회에 저항 없이 뿌리내리도록 하기 위하여는 다음 몇 가지 점을 반드시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먼저 법의 제정이나 집행에 있어 국민 심성(心性)이나 정서의 측면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예주법종(禮主法從)이라고 표현한 바와 같이 유교적 전통이 강한 우리 사회는 법이 지배하는 사회라기보다 인륜이나 예 또는 도덕이 우선시되는 사회에 가깝다. 더구나 일제 식민지배와 권위주의적 독재체제를 겪어 본 국민들은 법을 ‘서로를 편하게 하는 약속’이라기보다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반갑지 않은 굴레’로 인식하는 편이다. 지난해 시행된 어떤 여론조사 결과 ‘법을 지키면 손해’라는 응답자가 무려 72.7%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법 집행의 일관성·신뢰성은 말할 것도 없고 제정 과정의 신중함과 유소년기부터 범국민적 법 교육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 그러기 위하여는 사회지도층의 솔선수범과 공직윤리의 확립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 안 된다. 한 법률 전문지의 보도에 따르면 법률가들조차도 우리 사회에서 법치주의가 후퇴하고 있다고 보는 근거로 조사 대상자의 60.4%가 ‘지도층 인사의 반(反)법치적 행태’를 들고 있는 정도이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법은 국민들에게 지키라고만 요구한다고 해서 더 잘 지켜지지 않는다. 공직자들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혜택 받은 지도층에서 본을 보이며 많든 적든 국민들을 감동시켜야만 한 걸음씩 더 지키는 방향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역사적인, 또 사회적인 경험이다. 올바른 선비문화의 확립이나 제대로 된 상인정신의 정착 없이는 법의 지배 원리는 말할 것도 없고, 국가경쟁력의 향상도 국격의 업그레이드도 기대할 수 없음을 모두가 바로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우리 사회의 법치주의 정착이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가 분명해진다. 바로 국회를 비롯한 정치권의 불법·무질서가 그것이다. 지난해에 국제경영개발원(IMD)이 발표한 우리나라의 국가경쟁력이 57개국 중 27위,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발표한 국가경쟁력이 133개국 중 19위에 그친 사유도 살펴보면 노사문제와 함께 정치불안 내지 불신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법치주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우리 국회가 지난해까지 소집, 상임위 구성에서부터 법을 지키지 않더니 급기야 법률안 처리는 가장 적고 예산 심의는 42년 만의 기록을 깼다는 등의 오명(汚名) 속에 국민 신뢰도 꼴찌 기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법치주의의 장래를 위하여도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상인정신과 선비문화가 조화를 이룬 가운데 법치주의가 국민의 생활 속에 정착되고 그로 인한 국격의 향상과 사회의 선진화가 큰 마찰 없이 이루어지기를 새해에는 간절히 소망해 본다.

정성진 국민대 명예교수·전 법무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