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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길 산책] 가난 짙게 밴 홍난파 생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숲속으로 난 오솔길 옆 사시나무가 무더위를 떨쳐버리려는 듯 바람기도 별로 없는데 파르르 떤다.

칡넝쿨의 상큼한 냄새에 정신을 맑혀가며 여기저기 핀 으아리.나리꽃을 눈길로 밟다보니 어느새 둔지곶 안말 어귀다.

행정구역상으론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인 이곳이 바로 홍난파 선생의 탄생지. 일전에 고향집에 다니러갔다가 한창 꽃벌기중인 봉선화를 보고 맘속에 접어뒀다 우정 찾아나선 길이다.

남양면 네거리서 발안쪽으로 가는 317번 국도를 따라 오리쯤 가다 오른쪽 산길로 접어 십리를 채 못가는 곳에 나지막한 안산을 서쪽머리에 둔 마을이 아늑하기만 하다.

내리막 진입로를 사이에 두고 펼쳐진 밭마다 온갖 작물이 그득그득 키재기 경쟁을 하고 있는 품이 마치 전시장 같다.

등거리 대신 모시적삼 차림에 깨밭을 매고 있던 안노인의 손짓대로 한구비를 돌아드니 마흔살은 족히 됐을 호두나무가 서있는 마당 한켠에 네칸짜리 빈 초가(86년 복원)가 잡초속에서 덩그마니 손을 맞는다.

대지라야 고작 48평에 마루도 없이 안방.건넌방.봉당.부엌이 각 한칸씩이고, 두어발짝 떨어져 싸리울타리를 두른 허름함에 선생의 어릴 적 간고(艱苦)가 눈에 잡힌다.

가난이 천재를 만든 것일까. 선생의 탄생을 지켜보았다는 뒤뜨락 감나무는 말이 없다.

워낙 째지는 가난에 세살때 서울로 떠난 탓에 선생의 체취가 남았을 리 만무하건만, 누가 뿌렸는지 싸리울 밑에 제멋대로 자라고 있는 봉선화만이 무언가 증거하려는 듯 꽃망울을 벙긋거리고 있다.

금세라도 벌어진 꽃잎사이로 그의 혼이 담긴 명곡 '봉선화' 가락을 울려낼 태세다.

예나 지금이나 이 노래를 떠올리면 내남 할 것 없이 어쩔 수없이 애잔해지는 건 곡조도 그러려니와 암울한 조국의 운명에 빗대어진 봉선화의 여릿여릿한 자태를 늘 곁에선 보고 자란 까닭이리라.

이 노래를 작시한 김형준(金亨俊)선생의 집안에도 그랬듯이 웬만한 살림에는 울밑이나 장독대 주변에 반드시 이 꽃이 심기게 마련이었다.

꽃의 붉은 색이 사기(邪氣)를 막는다고 믿어 주거공간과 식생활의 기본을 지키게 하다 보니 그럴수밖에.

어쩌면 곱지만 화려치 않으면서도 말못할 사연을 지닌 채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촌색시 같은 수수한 멋이 우리네 정감에 어울린 탓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다 보니 봉선화는 자연 울안생활이 많은 여인네들의 사랑을 차지해 규중화(閨中花)로 불리기도 했는데, 특히 딸내미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천연 매니큐어를 제공해주는 화장품공장이기도 했다.

한껏 붉은 꽃잎을 짓쪄 명반.소금과 함께 새끼손가락이나 무명지 손톱에 올려놓고는 아주까리잎으로 싼 다음 실로 친친 동여매 하룻밤을 지새면 야하지 않은 붉은 물이 든 게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금기가 있어 부모상중엔 염지를 하지 않는 법이요, 엄지에 물들이면 아버지가 오래 사는 대신 엄마가 일찍 죽는다 하여 금했다.

또 손가락을 감은 채 문지방 셋을 넘으면 물들지 않는다고 해 꼬맹이 계집애들의 오금을 잡았고, 서리가 내릴 때까지 붉은 물이 남으면 신랑감이 나타난다는 믿음에 큰애기들은 행여 손톱이 빨리 자랄까 속졸임을 하곤 했다.

간장국 같은 낙숫물이 주룩주룩 떨어지는 여름날 툇마루에 앉아 엄마에게 콩잎만한 손을 들이밀며 물들여달라 졸라대던 누이의 어릿광이 지금도 선하다.

이만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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