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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오키나와의 미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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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류큐(琉球)열도가 오키나와(沖繩)현으로 일본에 편입된 것은 메이지(明治)유신 직후인 1879년이다.

그 전에는 류큐왕국이었다. 일본과 대만을 징검다리처럼 연결하는 50여개 섬들로 이뤄진 류큐왕국은 16세기까지만 해도 동아시아 해상 중개무역의 중심지였다.

기록에는 고려 창왕 원년(1389년) 류큐국의 왕이 사신을 고려에 보낸 것이 대(對)한반도 관계의 시초로 돼 있다.

왜구(倭寇)에 잡혀 류큐로 팔려간 고려인을 송환하겠다며 유황 3백근, 소목 6백근, 호초 3백근의 공물까지 들고 왔다.

교류는 조선시대로 이어져 류큐는 37차례나 조선에 사신을 보냈고 조선도 네차례 사신을 파견했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 침략을 위해 류큐국에 파병을 요청했지만 류큐왕은 조선과의 관계를 고려해 거절했다가 17세기 초 일본에 호되게 당하기도 했다. 일설에는 허균의 소설 '홍길동' 의 작중인물이 찾아간 이상향이 류큐국이란 얘기도 있다.

20세기 후반 오키나와의 역사는 미국이 썼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서 치러진 최대 지상전이었던 오키나와 전투에서 13만명의 일본인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가운데는 징용으로 끌려간 한국인도 많았다. 일본의 패전으로 오키나와는 미군지배로 넘어갔고 한국전이 터지면서 곳곳에 대규모 군사시설이 건설됐다.

오키나와가 한반도 유사시에 대비한 후방기지 역할도 맡게 되면서 한국과 오키나와를 다시 이어주는 연결고리로 미군이 등장한 것이다.

오키나와는 1972년 일본에 반환됐지만 지금도 오키나와현 전체면적의 10.5%가 미군기지고 일본 내 미군 점유지의 75%가 이곳에 몰려 있다. 미 주둔군과 군속만 5만명이다.

주요 8개국(G8) 정상회담이 내일부터 사흘간 오키나와에서 열린다. 95년 초등학생 윤간 사건에 이은 최근의 여중생 성추행 사건으로 주민감정이 몹시 격앙돼 있다.

오키나와 반환 이후 미군 범죄건수만 5천건이다. 한국과 오키나와 주둔 미군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떠받치는 버팀목이다.

당분간 10만명 규모의 주둔병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미 전략당국의 판단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주한미군의 독극물 방류사건과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문제로 여론이 들끓고 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오키나와 방문이 현지의 기류를 체감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 본다. 주한.주일미군이라는 안보적 문제가 범죄와 환경 등 사회적 문제와 갈등을 빚고 있는 만큼 현명한 해결책을 서로가 모색해야 할 때다.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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