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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아르키메데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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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두통이 나면 기하학에 몰두해 통증을 가라앉힌 파스칼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오늘날에도 일반인에게 수학은 여전히 '머리 아픈' 학문이다.

그러나 0과 1의 조합으로 이뤄지는 디지털시대를 맞아 수학의 중요성은 갈수록 부각되는 추세다.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는 과학.철학이 종교에서 분리되면서 유례없는 실증정신으로 꽃을 피웠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기원전 287~212년)도 헬레니즘이 낳은 위대한 천재였다.

그는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항구도시 시라쿠사에서 천문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레카(알아냈다)!" 라는 환호성으로 유명한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액체 속의 물체는 그 물체가 밀어낸 액체의 무게만큼의 부력을 받음)는 그가 시라쿠사 왕 히에론의 부탁으로 금관 속에 불순물이 없는지 알아보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이다.

당시는 전쟁으로 바람잘 날이 없었다. 로마와 카르타고가 맞붙은 제2차 포에니전쟁 때 시라쿠사는 마르켈루스 장군의 정예 로마군에 포위당했다.

기원전 212년의 일로, 아르키메데스는 투석기.기중기 등 '첨단과학' 을 활용한 신무기를 만들어 로마군을 괴롭혔다.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크는 당시의 광경을 '아르키메데스가 기계를 작동시키자 무기들이 한꺼번에 적진으로 날아가 덮쳤다. 거대한 돌무더기가 굉음과 함께 로마군 대열을 박살냈다' 고 묘사했다. 아르키메데스는 적의 함선을 불태우기 위해 거대한 볼록렌즈도 이용했다고 한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라쿠사는 함락됐다. 아르키메데스 사후 2백60여년 뒤에 태어난 플루타르크는 그의 죽음에 관한 목격담 세가지를 전하고 있다.

로마군이 위협하는 데도 연구 중이던 도형에서 눈을 떼지 않자 화가 나 찔렀다는 설, 로마군에게 "문제를 풀 때까지만 살려달라" 고 간청했지만 듣지 않았다는 설, 태양의 크기를 재는 도구들을 옮기다 도둑으로 오인받아 살해됐다는 설이다.

미국 과학자들이 10세기 양피지에 기록됐다 지워진 아르키메데스의 논문 필사본을 복원 중이라고 한다(중앙일보 7월 13일자). 마침 어제부터는 대전 한국과학기술원에서 국제 수학올림피아드가 열리고 있다.

지난 대회에서 우리 수학영재들은 81개국 중 7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기록했다. 아르키메데스의 후예들이 한국에서도 더 많이 탄생하길 기대한다.

노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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