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체험 그린 '링 0 버스데이' 관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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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멀티 태스킹.하이퍼 텍스트.사이버 스페이스. 윈도 체제로 운용되는 퍼스널 컴퓨터를 이용해 인터넷을 활용하는 사람이라면 매일 이런 단어들과 관련한 작업을 한다.

워드 프로세서 작업을 하다 인터넷으로 관련자료를 찾아 보며(멀티 태스킹), 이 자료 가운데 밑줄 쳐진 단어를 클릭해 더 심도있는 자료를 얻는다(하이퍼 텍스트). 이 모든 과정은 인터넷이라는 가상 공간(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책 얘기를 하다가 왜 느닷없이 컴퓨터 용어를 설명하느냐고? 바로 이 단어들이 소설 '링 0 버스데이' 를 이해하는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알 만한 사람들은 벌써 감을 잡았겠지만 이 소설은 일본에서 5백만부, 한국에서 30만부 이상 팔린 스즈키 코지의 공포소설 '링' 시리즈의 하나다.

원작의 큰 성공에 이어 속편격인 2권, 완결편인 3권까지 다 나온 마당에 코지는 0권이라는 알쏭달쏭한 제목을 붙여 한권을 더 추가했다.

일단 이 책은 전작들과 아주 비슷하다. 비디오테이프의 해답을 찾지 못하면 1주일 안에 죽고 마는 링 바이러스 감염의 공포, 책을 덮고 나서야 나 역시 감염됐음을 알게 되는 기분 나쁜 공포, 방대한 과학.의학 지식을 이용한 새로운 차원의 공포 등 1.2.3권이 각각 독특한 공포 유형을 제시했던 것처럼 이 책 역시 전혀 예기치 않은 공포로 독자들을 공격한다.

야마무라 사다코와 다카야마 류지를 중심으로 책이 한권 한권 나아갈수록 등장인물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구성 역시 그대로 따르고 있다.

어찌보면 전체의 요약본 같은 인상을 주는 이 책의 특이한 점은 종이책이면서도 마치 컴퓨터 작업을 하는 듯한 묘한 이야기 전개 방식이다.

책 한권 안에 1.2.3권 이야기를 동시에 늘어놓는 방식은 멀티 태스킹이며, 전편에 등장하기는 했으되 대사 한줄짜리 단역에 불과했던 인물을 주인공삼아 세세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하이퍼 텍스트 기능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공포가 실제 세계가 아닌 루프계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상공간에서 비롯됐다는 결말은 오늘날 사회문제로도 떠오른 사이버 스페이스와 현실세계의 혼동을 보여주는 것이다.

크게 세 장으로 이루어진 '링 0' 는 이전 시리즈를 읽은 사람이라면 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건들로 채워 있다.

묻어둔 기억을 들추듯, 아니면 오래 전에 녹화했던 옛 테이프를 재생하듯 전에 했던 이야기를 다시 조심스럽게 풀어낸다.

그런데 막상 읽다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전에 한번 겪었고 이미 사실은 밝혀졌다고 생각했건만 막상 진실은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다. 결국 같은 사건의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사이버 세계의 출현으로 인해 이미 다른 많은 SF공포영화들이 말하려고 했던 것, 즉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하는 물음은 이 책에도 던져져 있다.

다만 허무나 좌절이 아닌 희망을 말한다는 점은 다르겠지만.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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