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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익의 인물오디세이] 움직이는 '영화사전' 정종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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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몽고메리 클리프트·말론 브란도·딘 마틴 주연,어윈 쇼 원작,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의 영화는?

중년 가운데 망설이지 않고 ‘젊은 사자들’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영화광에 준(準)한다.그런데 이 영화에서 딘 마틴의 총을 맞은 말론 브란도가 개울에 쓰러져 숨을 몰아 쉴 때 생기는 물방울의 수는? 이 어이없는 질문의 답은 믿거나 말거나 열일곱 방울이다.

리얼리즘 서부영화의 명편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하이 눈’.극의 진행 시간의 양과 러닝 타임이 일치해 더 화제를 모은 이 영화에서 결투의 시간을 예고하며 긴박감을 고조시키는 장치는 시계다.시계는 모두 몇 번 나올까.23번이다.

20세기폭스영화사의 엠블렘에 나오는 조명등은 몇 개며, 파라마운트영화사 엠블렘의 산을 둘러 싼 별의 숫자는? 조명등은 5개며 그중 3개만 불이 들어온다. 별수는 24개,설립 자본금 2만4천불을 상징한다.

강신성일이란 이름으로 국회의원이 된 신성일과 그의 부인 엄앵란이 함께 나온 영화는 몇 편일까.당사자들도 모를 그들의 공연 영화는 56편이다.

‘황야의 7인’의 7인,‘5인의 해병’의 5인,원제가 ‘더티 다즌(Dirty Dozen)’인 ‘특공대작전’의 열두명.그 배우들은 누구누구인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부스러기 지식,‘말론 브란도의 물방울 숫자’는 몰라도,배우 이름 정도야 인터넷에 들어가면 그 뿐인 걸 갖고 웬 젠 체냐고 시비를 거는 사람은 진정한 영화광이 아니다.적어도 영화연구가 정종화(58)씨의 기준으로는 그렇다.예컨대 자식의 엄지발가락 밑에 혹은 사타구니에 점이 있는 걸 아는 어머니와 그렇지 않은 어머니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그는 강변한다.

젊은 시절 영화깨나 본 사람이 정씨를 만나면 적어도 하루쯤은 영화이야기에 취해 창 밖에 해가 졌는지,자정이 넘었는지,새벽이 언제 찾아왔는지를 모른다.그의 주장에 따르면 ‘제3의 사나이’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주인공 알리다 봐리가 저 멀리서 걸어오며 클로즈 업 될 때까지 떨어지는 낙엽의 수는 1백24장이다.

오드리 헵번의 우리나라 극장 개봉 영화는 정확하게 ‘로마의 휴일’‘사브리나’‘파리의 연인’‘전쟁과 평화’‘하오의 연정’‘파계’‘녹색의 장원’‘용서받지 못할 자’‘샤레이드’‘마이 페어 레이디’‘어두워질 때까지’‘멋쟁이’12편이다.(장황하게 제목을 거론한 이유는 정씨의 속사포 같은 말투를 전달하기 위해서다.)또 ‘벤허’는 국내에서 62년·72년·81년·97년 각각 개봉됐고,여자가 아무도 나오지 않은 수입영화는 험프리 보가트의 ‘사하라 전차대’,로버트 미첨의 ‘상과 하’,피터 오툴의 ‘아라비아의 로렌스’다. 단, ‘사하라 전차대’에는 추락한 독일군 조종사의 지갑 속에 그의 부인 사진이 있고,‘아리바의 로렌스’에는 카이로 시내를 걸어가는 여인의 뒷모습이 보이지만 ‘출연’으로 치지말자고 부언한다.

영화이야기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소설가 안정효씨가 92년 장편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출간했다.중년 이상의 영화광에게는 정말 ‘경사났네’였다.50∼60년대 영화 제목과 영화내용과 배우들 이름이 숨가쁘게 흘러가는 그 책을 정씨도 당연히 밤새워 독파했다.

그리고 ‘옥에 티 찾기’에 들어가 24군데의 착오를 찾아냈다.무려 5백16편의 영화가 등장하는(이것도 정씨가 일일이 세어 밝혔다.)소설에서 정씨는 예를 들어 “롯사나 브리지 주연의 ‘행복’은 ‘축복’의 잘못이다.‘빵과 사랑과 꿈’의 여배우는 지나 롤로브리지다인데 소피아 로렌으로 돼있더라.‘북서로 가는 길’의 감독은 킹 비다가 맞다.”등을 편지에 적어 안씨에게 부쳤

다.

안씨는 상상치도 않았던 강적의 출현에 일순 당황했으나 곧 예를 차리고 정씨에게 일전(一戰)을 제의했다.영화의 대명사인 충무로의 한 맥주집에서 처음 대면한 동년배의 두 사람은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치열을 극한(?) 신나는 공방을 펼쳤으나 결과는 무승부,아니 둘 모두의 승리였다.재미있는 우연은 두 사람 다 10대 시절의 거주지가 마포 경보극장 인근이어서 그 극장의 쾨쾨한 냄새의 묘사까지 승부를 다퉜다고 한다.

정씨는 우리나라에서 개인으로는 유일하게 4천여장의 영화포스터를 보유하고 있다.포스터뿐만 아니라 팸플릿·스틸사진·영화서적에서 50∼60년대 극장 입장권까지 2만여점을 갖고 있다.94년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정지영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 것은 정씨의 고증과 자료제공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 인연으로 안정효·정종화·정지영 세 사람에다 나중에 몇 사람이 더 붙어 ‘영광회(映狂會)라는 거친 이름의 영화잡담 모임을 계속 가지기도 했다.회원중 ‘2만편의 영화를 보고 50개국어를 안다’고 주장하는 박영복(48)씨는 ’제목으로 영화읽기‘라는 책을 냈다.

정종화씨는 53년 6.25 피난지인 부산에서 존 포드 감독,존 웨인 주연의 ‘역마차’를 보고 그 때 주운 포스터와 팸플릿을 시작으로 47년간 영화자료를 모와 왔다.

그의 ‘보물창고’에는 국내에선 유일하게 쟝 가방의 ‘망향’,소피아 로렌의 ‘해녀’,앨런 라드의 ‘쉐인’도 있고 이규환 감독의 ‘임자없는 나룻배’(32년)·‘춘향전’(55년),김지미의 데뷔작인 ‘황혼열차’(57년),임권택 감독의 데뷔작 ‘두만강아 잘있거라’(62년),이만희 감독의 ‘만추’(66년)도 있다.또 44년작인 ‘거경전(巨鯨傳)’은 촬영기사 김학송씨가 2장을 보관하다가 한 장은 영상자료원에 또 한 장은 정씨에게 주라고 유언하여 그의 소유가 됐다.

‘충무로의 넝마주이’라는 필자의 표현을 그는 웃음으로 넘겼지만 그의 포스터나 스틸사진 수집 이력을 보면 왕(王)넝마주이를 방불케 한다.영화구경 갔다가 벽에 걸린 포스터를 뜯은 것은 예사고,영화관에서 동네 여기 저기 붙여놓은 포스터도 수시로 슬쩍 했다.

그가 지금은 없어진 국제·아카데미…(개봉관),경남·금성·계림…(재개봉관),미우만·시네마코리아…(동시상영관)을 비롯해 서울시내 극장지도를 자신의 손금보듯이 아는 것도 그런 이유다.영화자료를 구하기 위해 대한극장의 창고를 10일동안 자진해 청소한 것도 충무로의 ‘전설’쯤 된다.

안방에서 건넌방 오가듯 하는 게 영화계 인사들의 회사이동이지만 그는 그가 그동안 영화사 일곱 곳,영화잡지사 다섯 곳,극장 두 곳을 오가며 일한 이유도 영화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모은 자료를 보고 또 보고 외우고 또 외워 “한국영화 최초의 목욕 장면은 57년 ‘그여자의 일생’에서 윤인자,최초의 키스 장면은 57년 ‘애천의 고백’에서 전택이와 노경희,대한극장의 개관 프로는 58년 4월 18일 케리 그란트·데보라 카 주연의 ‘잊지 못할 사랑’,최초의 스포츠 소재 한국영화는 권투 59년 ‘피묻은 대결’,야구 63년 ‘사나이의 눈물’,축구 67년 ‘맨발의 영광’”이라고 어린애처럼 떠들어 주위를 즐겁게하다가 ‘몇 년 몇 월 며칠 단성사에 걸린 영화가 뭐냐’따위를 물어 상대방을 끝내 짜증스럽게도 만든다.

그는 영화예술의 창작과 이론 어느 쪽에서도 일하지 않아 인생이 그리 폼나 보이지는 않는다.독일의 표현주의가 어떻고,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이 어떻고 하는 얘기가 그의 입에 걸리지는 않는다. 줄줄이 튀어나오는 것은 국내에 수입된 할리우드 영화고,남루했던 한국영화의 이면이다.

그러나 명작이라는 이만희의 ‘만추’필름조차 밀짚모자의 장식테로 박대하다 프린트 한 벌도 남아 있지 않은 풍토에서 한국영화계는 그에게 깊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86년 충무로 지하철역 로비에서 우리영화사상 처음으로 포스터 전시회가 열린 것은 오로지 그가 있어 가능했다.그후 그는 대종상이나 청룡상영화제,영화의 날 등을 기해 지금까지 40여차례 포스터 전시회를 마련했다.

특히 지난해에는 지하철 혜화역에서 한국영화 5천편 제작(‘의리적 구토’에서 ‘간첩 리철진’까지)을 기념해 자비로 전시회를 가졌다.또 소장한 포스터 중 중요한 것을 가려 ‘한국의 영화포스터’1·2권(범우사)을 출간했고,‘자료로 본 한국영화사’1·2권(열화당)도 내놓았다.포스터집 제3권은 8월중 나온다.

그의 일과는 지금도 일반회사원에 못지 않은 쳇바퀴를 돈다.오전엔 자료를 ‘감상’하며 필요한 글을 쓰고(요즘은 한국영화 5천편의 각종 기록을 뒤져 이를 오는 연말쯤 출간할 예정이다),오후엔 보통 2시에 시작하는 새 영화 시사회장에 가 젊은이들 틈에 끼어 있고,다시 자료를 찾아 헤매다,교통방송 등에 나가 영화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는 아직 미국에 가보지 않았다.기회가 닿으면 그와 함께 할리우드로 가 한 이틀 낮 밤 커크 다글라스에서 마이클 다글라스 부자까지,헨리 폰다에서 브리짓 폰다 부녀까지 떠들었으면 좋겠다.“거 무슨 식민적 발상”이냐고 말하는 사람은 영화광 근처에도 못간 사람이다.

스포츠·문화에디터 이헌익

***영화연구가 정종화 약력

▶ 42년 생.

▶ 50년 초등교3년 때 첫 영화관람 '성벽을 뚫고' (한형모 감독)

▶ 63년 서라벌예대 졸

▶ 영화사 7곳 등 극장.영화전문지 20여사서 활동

▶ 86년 국내 첫 영화포스터 전시회

<저서> 영화동네 사람들,

한국의 영화포스터 1.2, 자료로 본 한국영화사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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