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황혼 이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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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통 유대교 율법에 따르면 아무리 당사자끼리 합의했더라도 율법재판소의 허락이 없으면 이혼이 불가능하다.

율법재판소는 이혼의 당위성 여부를 탈무드를 기준으로 엄격하게 따져 '게트(gett)' 라는 이혼장 발급 여부를 결정한다. 이혼 절차를 밟기 위해서는 우선 게트를 손에 쥐어야 한다.

두 명의 증인과 재판에 참여한 세 명의 랍비가 지켜보는 가운데 남편이 오무려 모은 아내의 두 손에 게트를 떨어뜨림으로써 비로소 이혼이 성립한다.

인류학자들은 결혼에 대한 정의(定義)가 엄격하고 결혼 의식이 성대한 사회일수록 이혼이 어렵다고 말한다. 1주일 낮과 밤 동안 계속되는 유대인들의 결혼식은 성대함의 극치다.

결혼식이 화려하기는 이슬람교나 힌두교 전통에서도 마찬가지다. 모계사회일수록 이혼이 쉽다는 것은 인류학자들의 또 다른 발견이다.

북아메리카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경우 아내가 신발을 벗어 문지방에 놓으면 그것으로 바로 이혼이다. 가부장적 질서가 강고(强固)한 사회일수록 여성의 의사에 따른 이혼은 성립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여성들에 의한 '황혼이혼' 신청이 크게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전체 이혼 상담의 10% 정도가 결혼생활 20년 이상 된 부부의 상담이고 그중 80%가 여성 쪽에서 이혼을 원하는 경우라고 한다.

1990년대 들어 일본에서 불기 시작한 '정년이혼' 바람이 우리나라로 건너온 게 아니냐는 얘기도 들린다.

남편의 권위에 눌려 지내면서도 아이들 때문에 참고 견디다 자녀들이 성년이 되고 남편이 사회적으로 힘을 잃고, 게다가 남편의 퇴직금까지 예상되는 시기에 맞춰 남편의 허를 찌르는 '무서운' 여성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법원의 판례는 황혼이혼에 대해 아직은 부정적이다. 한 칠순 할머니가 팔순 할아버지를 상대로 낸 이혼 소송에 대해 지난해 말 대법원은 "남편이 가부장적 권위를 내세워 순종을 강요했더라도 결혼 당시 혼인에 대한 가치기준과 동떨어지지 않았다면 이혼사유가 될 수 없다" 고 기각, 가부장적 의식구조의 한계를 둘러싸고 열띤 논쟁을 촉발한 바 있다.

며칠 전 한 중견기업 회장 부인인 70대 할머니가 "남편의 구타와 외도를 더이상 참을 수 없다" 며 이혼 및 1천억원 규모의 재산분할조정 신청을 법원에 내 제2의 논쟁을 예고하고 있다. 가슴 조이며 법원의 판결을 지켜볼 사람이 어디 당사자뿐일까.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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