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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의 이승기, 南의 이태규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한 방송사의 오락프로 ‘1박2일’에는 미남 가수 이승기가 출연, 인기를 끌고 있다. 북한에서도 다른 분야지만, 이승기만큼 유명했던 ‘이승기’가 있었다. 6·25전쟁 당시 서울대 공과대 학장을 하다 월북한 화학자 이승기는 미국 듀폰사가 나일론을 개발한 직후 비날론이라는 합성섬유를 발명했다. 그는 북한 정권의 총애를 받다가 1996년 사망했다. 이승기와 함께 우리 과학계에는 당시 서울대 문리대학장이던 이태규(1992년 사망)가 있었다.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 일본 교토대 교수로 조선의 과학역량을 과시한 쌍두마차였다. 이승기는 북에서, 이태규는 미국과 한국(KAIST 화학과)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1991년 남북한의 과학자들이 ‘한민족 과학기술회의’라는 이름으로 중국 옌볜에서 처음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이 남과 북에서 길러낸 제자들의 인연이 닿아서였다. 당시 만남은 화학계가 주도했다. 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과총) 주관으로 수학과 자연과학 분야의 남북한 학자, 조선족·중국인 학자들까지 참석했다. 옌볜에서 양측 수학자들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서로가 사용하는 수학용어를 비교해 사전을 만드는 일이었다. 팔매선, 덜기, 늘임선, 뾰족각…. 팔매선은 포물선이고 덜기는 뺄셈, 늘임선은 연장선, 뾰족각은 예각이다. 꽤 괜찮게 만든 용어라고 생각한다. 94년에도 중국과학원의 도움을 받아 베이징에서 한민족 수학자회의가 열렸는데, 더 이상 교류는 이어지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연결고리 역할을 할 양측의 원로 학자들도 한 분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2006년 박찬모 당시 포항공대 총장이 중심이 돼 시작한 남북한 교류의 결과로 지난가을 평양과기대(PUST)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최근 남북 과학자 교류는 남북한 분위기 경색과 북한 측의 소극적인 자세로 답보 상태다. 올해 예정됐던 과총 주최 평양 남북과학자회의도 내년으로 연기됐다. 대한수학회는 수학과 정보기술(IT) 분야 교류협력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다. 지난주 중앙SUNDAY는 스튜어트 토슨 미 시러큐스대 교수의 방북 인터뷰를 통해 미 과학자들과 북한의 IT 교류·협력 수준을 보도했다. 양측이 그 정도로 깊은 교류를 해왔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남북한은 그동안 중국과학원 등 중국 측을 끼고서 학자 간 교류를 할 수 있었다. 이러다가 미국의 도움 또는 중재로 남북한 과학자들이 만나야 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도 들었다.

지난 5월 대한수학회보에는 색다른 논문이 게재됐다. 북한 김일성대학 한송철 교수가 중국인 교수와 함께 실은 퍼지이론의 IT 분야 응용을 주제로 한 논문이었다. 과거와 달리 실용성과 응용성에 포커스를 둔 것으로, 최근 북한 수학계의 세대 교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됐다. 중국에서 공부한 한송철 교수는 5년 전쯤부터 미국, 유럽, 중국, 동남아의 여러 국제 학술지에 영어로 논문을 게재했다. 미국 수학회의 논문 평가도 받았는데, 꽤 높은 수준으로 평가됐다. 10 여 편의 논문에서 캐나다 화학자들의 오류를 밝혀내기도 하고, 84년 재미동포 수학자인 김기항 교수 등이 제기한, 20년 동안 누구도 풀지 못했던 행렬에 관한 문제의 해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2014년 서울에서 세계수학자대회가 열린다.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도 이 대회를 통해 수여하게 된다. 한국인 수상자가 나올 수 있다는 기대를 할 정도로 최근 우리 수학 수준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북한은 2006년 스페인 마드리드 대회에 참석했고, 내년 인도 대회에도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2014년 북한의 수많은 과학자가 서울을 방문해 한국의 수학자들과 우정 어린 일합을 겨뤘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춤해진 남북 과학자 교류도 적극 추진됐으면 한다. 60년 전 이승기와 이태규는 조국의 과학 발전을 위해 힘을 모으지 못한 채 남과 북으로 헤어졌다. 이제 그 불행한 역사를 후학들이 거둬야 하지 않을까.

한상근 교수 KAIST 수리과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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