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북한이 미국을 잘못 알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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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지난 30여년 동안 백악관 주변의 분위기는 대체로 별 변화가 없다가 9.11 테러 사건 이후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다. 옛날에는 내 사무실에서 5분 거리인 백악관 주변을 점심 후 산책도 했으나 지금은 백악관 앞 도로가 완전히 차단되고 그 앞의 예쁜 공원도 경호를 위한 공사로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돼 있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어느 때보다 긴장하고 있고 국방비를 포함한 안보예산은 9.11 전보다 50% 증가한 5500억달러로 북한 국내총생산(GDP)의 30여배가 되었다. 이제 미국 안에서의 테러 위험이 커질수록 한반도, 특히 북한의 안보는 더 위태로워진다. 미국은 여론이 지배하는 민주국가이기 때문에 여러 갈래의 여론에 민감하여 때로는 우유부단하게 보일 때도 많아 미국을 정말로 잘 이해하지 못하면 소위 '종이 호랑이'로 오해하기 쉽다. 지난달 공개된 미국 외교문서를 보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직후인 90년 8월 바그다드 주재 미국 고위 외교관을 접견한 사담 후세인은 미국이 쿠웨이트 전쟁에 절대로 뛰어들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장담했다.

후세인 '미국의 전쟁 불개입'오판

후세인은 그 근거로 미국의 베트남전 중도포기와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 파견됐던 미 해병대가 단 한번의 트럭 폭탄 테러를 당하고 황급히 미국으로 철수한 것 등을 예로 들면서 미국은 단 1만명의 미국 병사들의 피도 중동의 모래밭에 흘릴 각오가 안 된 나라라고 결론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9.11 사태는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으며 종이 호랑이가 아니라 옛날 인디언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서부황야를 개척했던 호전적 국민으로 변했다. 지금 미국이 특별히 경계하는 것은 비행기나 트럭을 이용한 테러보다 핵폭탄 등 대량살상무기를 이용한 테러 가능성이다. 그런데 이런 테러 가능성이 제기될 때마다 이런 무기의 근원지로 미국인들 사이에 제일 먼저 지목되는 나라가 북한이다. 북한은 세계에서 셋째로 많은 생물화학무기를 소유하고 있고, 이미 두세개의 핵무기를 개발해 놓았으며 올해 말까지는 5~6개 정도 더 핵폭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이곳 전문가들은 관측하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미국 정부와 여론 주도층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데 있다. 최근 방송된 CNN의 핵무기 테러에 관한 특별 프로그램에도 제일 먼저 나오는 장면이 마카오의 한 어두컴컴한 술집에서 북한 요원이 조그마한 손가방에 든 핵폭탄을 옆 좌석에 앉아 있는 국제 테러범에게 넘겨주고 유유히 사라진 모습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저변에는 첫째,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가지고 있고 둘째, 외화에 궁한 북한은 많은 돈만 주면 국제 테러범들에게도 주저하지 않고 이런 무기를 팔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이러한 확신이 CNN뿐 아니라 '핵무기 테러'의 저자인 하버드대 그레이엄.앨리슨 교수 등 학계.연구소.정부기관 전문가들 사이에 이미 자리 잡고 있다는 데 한반도, 특히 북한의 안보 위기의 심각성이 있다. 앞으로 2~3년 안에 미국 내에서 또다시 수천명 내지 수만명이 다치는 테러 사건이 안 난다는 보장이 없고, 또 많은 전문가는 반드시 일어날 확률이 크다고 보고 있다. 9.11 테러 사태에 버금가는 또는 그보다 큰 테러 행위가 미국 내에서 일어난다면 여론을 중시하는 미국 정부가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한 것처럼 분개한 국민을 다스리기 위해서라도 어느 나라를 분명히 보복 공격할 것이고, 이러한 대상국 중 영(零)순위에 북한이 있다는 데 우리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핵 빨리 매듭, 미국 안심시켜야

9.11 이전에는 북한 같은 후진국가가 비밀리 핵폭탄을 개발했다가 깜짝스러운 핵폭발 실험을 하여 핵 보유국으로 기정사실화하는 파키스탄식 안보구축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북한 같은 후진국들의 핵무기 개발과 보유는 그런 의심만으로서도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처럼 오히려 안보위기를 더욱 부채질하는 촉매 역할을 하게 되었다. 북한은 미국에서 다시 대형 테러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빨리 핵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미국을 안심시켜야 한다. 핵 문제가 해결되면 미국과의 외교관계 수립도,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 가입도 가능해져 해외의 자본과 기술이 자유롭게 유입돼 북한의 훌륭한 인적자원과 결합될 때 경제는 부강해지고 참다운 안보도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박윤식 조지워싱턴대 교수.국제금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