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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회의서 ‘내복 쇼’ 할 때 아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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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거리에서 치근대는 거지에게 행인이 쏘아붙였다. 멀쩡한 사지를 갖고 구걸한다고 말이다. 그러자 거지가 이렇게 되받았다. “동전 한 닢 얻기 위해 내 팔다리를 자르란 말이오?”

지구온난화 문제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 회의를 한다고 모일 때면 이 얘기가 생각난다. 선진국은 개도국이 팔다리를 잘라야 돈을 주겠다고 하고, 개도국은 돈 한 푼 얻기 위해 사지를 자를 순 없다고 반박하는 듯해서다. 얼마 전 코펜하겐에서 열린 15차 유엔기후변화협약 총회도 그랬다. 미국 등 몇몇 선진국끼리 비밀리에 만든 덴마크 초안은 그들의 진심이 담긴 문건이다. 개도국도 자신들과 똑같이 2050년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1990년의 절반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고 털어놓았다. 이렇게 하면 내년부터 3년간 매년 100억 달러씩 지원하겠단다.

개도국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없는 얘기다. 빈곤에서 탈출하려면 이산화탄소를 배출할 수밖에 없다. 성장 원천인 에너지가 화석연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선진국의 산업화도 환경 파괴의 과정이었다. 온난화의 주범이 자신들인데도 선진국은 이 엄연한 사실을 애써 무시한다. 대신 개도국에 온실가스 사용을 중지하고 열대우림을 자르지 말라고 강요한다. 이렇게 사지를 자르면 매년 100억 달러씩 주겠다는 게 덴마크 문건이다. 그야말로 동전 한 닢이다. 차라리 안 받고 말겠다는 개도국의 항변은 그래서 설득력 있다. 게다가 개도국의 대변자인 중국이 G2의 일원으로 부상했다. 세상은 이제 미국 뜻대로만 굴러가지 않게 됐다. 중국이 ‘노(No)’라고 외치는 한 합의는 힘들다. 이번 회의의 실패가 진작 예견됐던 이유다.

그런데도 대부분 이번 총회를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가한다. 내년 말 멕시코 총회에서는 합의될 것이란 기대도 한다. 잘못된 평가고 어리석은 기대다. 이번 회의는 완전 실패다. 반드시 합의가 이뤄져야 했던 회의였다. 2007년 발리 총회에서 협상 타결 시한을 올해로 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합의는커녕 법적 구속력이 없는 ‘유의한다’는 정도로 끝났다. 별것 아닌 내용뿐이었는 데도 말이다. 내년 멕시코 회의도 쉽지 않을 게다. 실패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협상 타결 시한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협정문은 “다음 주최국은 회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절차를 밟을 것을 요구한다”고만 돼 있다. 2010년이란 타결 시한은 어디에도 없다.

내년에도 실패한다면 다음 수순은 양자 간 협상이 될 것이다. 선진국은 늘 그래 왔다. 원하는 대로 다자간 협상이 흘러가지 않으면 양자 간 협상에 기댔다. 무역뿐 아니라 기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른바 국경세(border tax)가 그것이다. 자신들이 정한 온실가스 감축 기준에 미흡한 제품이 수입될 경우 세금을 물리는 제도다. 유럽은 2012년부터 수입되는 자동차는 1㎞ 주행 시 120g 이하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돼야 한다고 공표한 바 있다. 기후를 보호무역의 수단으로 삼겠다는 의미다. 하긴 일자리 창출을 위해 보호주의로 돌고 싶던 참이었는데, 잘됐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의 전략도 달라져야 한다. 온실가스 감축 정책은 제조업 위주로 가야 한다. 양자 간 협상과 녹색 보호주의의 타깃이 제조업이라서다. 그런데도 정부는 정책 방향을 가정과 대형 건물, 교통 분야로 잡고 있다. 대통령이 실내 온도가 19도를 넘는다며 화를 내고, 에너지를 많이 쓰는 건물의 난방 온도도 점검하라고 닦달한다.

지식경제부가 내놓은 에너지 목표관리제 대상도 대형 건물과 가정 위주다. 잘못됐다. 어렵더라도 제조업의 온실가스 감축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가정이나 건물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은 실효성도 문제다. 실내가 추우면 사람들은 발밑에 몰래 둔 히터를 튼다. 이런 것까지 일일이 점검하려면 막대한 돈이 든다. 지금은 내복 입고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쇼를 벌일 때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산업용 이산화탄소 감축을 어떻게 해야 경쟁력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녹색 무역장벽을 피해 나갈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경제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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