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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시평

수애의 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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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수애는 ‘아버지’라는 단어만 나오면 그와 동시에 그 큰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신기료장수였다. 헌 신을 깁는 아버지의 고단한 일상이 딸의 기억에 얼마나 아프게 못 박혔으면 그렇게 울었을까 싶다. 삽화가 들어간 동화책에서 군고구마장수와 함께 친밀하게 다가올 것만 같은 그 신기료장수의 딸이 마치 신데렐라처럼 세상 위로 둥실 떠올랐던 걸까. 그녀의 남동생은 여자친구를 처음 집으로 초대해서 수애와 맞닥뜨릴 때까지 자신의 누나가 누구인지에 대해 입 벙긋도 안 했다고 했다.

어떤 차분함과 나대지 않음, 그런 특성을 남매가 공유했나 보다. 어쩌면 그 아버지와 어머니, 딸과 아들은 이 나라가 아직 빈곤의 덫에서 채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의 아리고 쓰라린 생채기를 여전히 보듬고 살고 있는지 모른다. 비록 톱스타라고는 하나 인기는 물거품과도 같은 것, 어느 찰나에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그런 성숙한 인식이 톱스타가 되기 전에 이미 그녀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던 모양이다. ‘신기료장수의 딸이었던 나와 톱스타인 나, 그것은 둘이 아니에요, 그저 나일 뿐이라고요’. 수애는 말없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20여 년쯤 전이었던가. 가난한 환경에서 공부한 서울대학교 수석 입학생이 ‘가난은 죄가 아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죄가 아니고 “다만 불편할 뿐이다”라고 했다. 요새 ‘쿨’한 젊은이들은 이 말에 대해 ‘누가 뭐라나’ 하고 말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토록 명민한 학생이 가난은 죄가 아니라고 했을 때, 그 말은 곧 세상이 가난을 죄로 본다는 사실을 웅변하는 것이었다. 소년은 스스로 되물었을 것이다. ‘달동네의 수재인 나는 왜 이상한 윤리적 자책감에 시달려야 하는가’.

수애의 가족은 아마도 신기료장수인 아버지와 더불어 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했겠지만, 그녀의 굵은 눈물방울이 과연 ‘불편함’의 기억에서 분출된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나라 전체가 못살던 시절에는 의무교육은 말뿐, 초등학교에서도 육성회비라는 것을 꼬박꼬박 내야 했다. 선생님들도 참 고역이었다. 기한 내에 육성회비를 못 낸 학생들을 굳이 교실 앞으로 끌어내서 창피를 줘야만 했으니까. 그때 수모를 당하던 학생들의 마음속에서 가없는 죄책감이 일지 않았겠는가. 분명 가난은 죄였고 확실한 모욕이었다.

이젠 육성회비의 시대는 아닌데, 젊은 부부들이 사교육비 부담 때문에 출산을 꺼린다고 한다. 아주 단순 소박하게 이 현상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사교육을 못 시키면 자식 성적 올려줄 수 없고 결국 좋은 대학 들여보낼 수도 없다. 그렇게 되면 그 애들이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일은 그저 막막할 뿐이다. 그러니 안 낳는 게 낫다’. 행복은 분명히 성적순이다. 고교 때까지의 공부는 인생의 전부다. 이렇게 굳어져 버렸다.

황당할 노릇이다. 사교육만 시켜 주면 누구나 다 성적이 올라가느냐 말이다. 세상은 높은 곳이 있으면 낮은 곳이 있게 마련이다. 땅이 있으므로 하늘이 있다. 모두 함께 휴거(携擧)되어 우주에서 유영할 일은 없다. 누군들 키 작게 태어나고 싶었겠는가. 그럼에도 단칼에 ‘루저’가 되어 버린다. 키가 작은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잘난 그대의 키가 큰 것인데….

언제부턴가 20:80의 사회라고 한다. 개인적인 성취동기는 오로지 상위 20%를 향해 치솟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성취지향이 그대로 이 사회 전체의 윤리가 되어도 좋은지 되물어야 한다.

세계 속에서 한국은 여전히 치열하게 경쟁해야만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공동체 속에 그런 경쟁논리가 그대로 이식되어도 좋은 것인가.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의 논리가 지속적으로 사회를 지배한다면 결국 수많은 ‘루저’들은 생존과 종족 보존의 본능까지 버릴 것이다. 토대가 모래알처럼 흩어지면 그 사회는 저절로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바로 지금 출산율 최저의 기록과 함께 밑바닥이 균열되는 것을 보고 있다. 함께 살아야 한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정재숙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