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칼럼] 의사는 무엇으로 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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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북한에 관한 모든 것이 금지되던 시절이 있었다.

민주주의를 외치며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불과 10여년 전 일이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서 그런 일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내가 한국을 발견한 것은 1988년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너무나 먼 과거처럼 느껴진다.

경제발전과 의식.사회의 변화 등 한국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 빨리 변하는 것 같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방북을 계기로 갑자기 북한에 관한 모든 것이 대유행이다. 경제위기가 엊그제 일이었는데도 지금은 의사들까지 나서 파업의 권리를 외치고 있다.

나는 파업이 '국민적 스포츠' 인 나라, 프랑스 출신이다.

1946년 헌법 전문에 명시된 파업에 관한 권리에 따라 프랑스 노동자들은 임금뿐만 아니라 기업경영에서 정부정책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고 있다.

파업은 명백한 시민의 권리이며, 파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성숙한 민주주의의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파업이 아무렇게나 행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의약분업에 관한 의사들의 요구가 정당한지는 논외로 치더라도 병원과 환자를 저버릴 권리가 과연 그들에게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병원이 국립인 프랑스에서 의료종사자들의 파업은 엄격한 절차와 규정에 따라 조건부로 시행된다. 파업에 들어가더라도 최소한의 서비스는 유지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에서 의사는 일반 노동자들과 똑같은 조건으로 파업의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법에 보장된 파업의 권리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다루는 일이 워낙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플 때 치료받을 수 있다" 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에 속한다. 생명이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환자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신속하게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건 인권의 문제다.

파업에 따른 온갖 종류의 불편을 경험하고, 또 그것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프랑스인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의사가 모자라 응급환자를 돌려보냈다는 소식에 경악하고 분노했다.

물론 대부분의 병원이 사립인 민주주의 국가 한국에서 병원에서 일하는 몇몇 사람들에게서만 파업의 권리를 박탈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책임' 과 '사명' 에 비추어 파업의 권리를 다른 방법으로 행사할 수는 없었을까. 한국에 살면서 은행이나 회사직원들이 머리띠를 동여매거나 완장을 두른 채 자리를 지키면서도' 충분히' 자신들의 요구를 표명하는 것을 여러번 보았다.

일반 노동자들도 이런 식으로 파업을 하는데 하물며 '꼭 있어야 할 노동자' 들이 모여 있는 병원에서 택한 방법이 집단폐업이란 말인가.

오늘날 유럽에서 의사는 더이상 성공의 대명사로 통하지 않는다.

일반 전문의의 소득이 여느 중소기업 간부의 봉급보다 많지 않은 실정이기 때문에 의사라는 직업은 사회적 지위향상을 꿈꾸는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

따라서 감히 단언컨대 '의사가 된다' 는 것은 '신부가 되는 것' 과 같은 이유 즉 '사명감' 에 의해서일 것이다.

사명감. 의사라는 직업을 설명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있을까. 나는 친절하고 능력있고 인간적인 한국 의사 선생님들을 만났던 것을 기쁘고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한국에서 의사가 사명감의 문제일까. 솔직히 말해 의사가 됨에 있어서 부와 지위가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간주되고 있는 건 아닐까.

몇년 전 한 프랑스 친구가 사고로 얼굴에 큰 상처를 입어 응급수술을 받아야 했던 적이 있다.

친구는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급히 실려갔는데 수중에 충분한 돈이 없다는 이유로 치료를 거부당했다. 다행히 그는 그 대학병원 교수 한 분을 알고 있었다.

노발대발 뛰어오신 의사 선생님께선 응급실 인턴을 모두 모아놓고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명시된 의사의 윤리를 몇 번이고 상기시켰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봉사하고 고통을 덜어주고, 병을 고쳐 낫게 하는 사람. 아픔으로 고통받는 이를 위해 자기 자리를 꿋꿋이 지키는 사람, 의사. 그보다 더 고귀하고 아름다운 직업이 또 있을까.

필립 르보르뉴 이화여대교수.불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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