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화폐단위 변경의 득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나 이민 가야겠다."

얼마 전 평소 알고 지내던 어른 한 분이 전화를 걸어와 안부도 묻기 전에 대뜸 이 말부터 꺼냈다. 요즘 돌아가는 분위기로 봐선 화폐개혁을 언제 해도 할 것 같다며 불안해 못 살겠다는 것이다. 60대 중반을 넘긴 그는 평생을 열심히 일해온 사람으로 모아둔 재산도 적지 않다. 그런 그가 불안해 한국을 떠나겠단다.

그는 5.16 쿠데타 직후 군사정권이 단행한 3차 화폐개혁을 떠올렸다. 지금 거론되는 화폐단위 변경이 당장 하자는 것도 아니고, 가진 사람들에게서 돈을 빼앗으려는 것은 더욱 아닐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그의 불안감을 덜어주질 못했다.

화폐단위 변경 논의에 불안해 하는 사람이 어디 한 사람뿐일까. 많은 사람이 화폐단위를 바꾸자는 얘기가 불쑥 튀어나온 배경을 더 궁금해 한다.

화폐단위 변경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화폐단위를 변경하면 통화의 대외적 위상이 높아지고, 거래와 회계장부 정리가 쉬워진다고 한다. 인플레이션 기대심리가 억제되고, 장롱 속에 들어가 있는 돈이 나와 소비가 촉진되고, 산업자금 공급이 늘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1달러에 1140원이나 하는 환율로 원화를 국제화하기는 어렵다. 원화가 국제경제통화로서의 지위를 갖추기 위해 화폐단위를 변경해야 한다는 지적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도 때가 있고 여건이 갖춰져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실력도 없이 1달러에 1000원짜리를 1원짜리로 바꾼다고 국제금융시장에서 한국 돈을 알아줄 리 만무하다.

일본의 엔화는 달러화와의 교환비율이 100대 1이 넘지만 이미 국제결제통화 역할을 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화폐단위 변경 논의가 끊임없이 나왔지만 지금은 잠잠하다. 경제가 확실히 살아나지도 않은 마당에 화폐단위 변경은 논의 자체가 적절치 못하다는 판단에서다.

장롱 속 돈을 끌어내 소비를 촉진하고 산업자금으로 쓴다는 논리는 더욱 설득력이 없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지 오래고, 신용카드 사용이 늘어난 지금 장롱 속에 보관된 돈이 과연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그 돈이 밖으로 나와 소비나 투자로 연결된다는 보장도 없다. 부자들이 움츠리고 있는 것은 앞날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돈이 금융권을 맴돌며 기업 쪽으로 가지 않는 것은 마땅한 투자대상을 못 찾아서다. 화폐단위 변경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상거래의 편의를 위해서라면 화폐단위를 바꾸는 것보다 고액권을 찍어내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다. 비용이 적게 드는 것은 물론이고 국민의 불안감도 크지 않을 것이다. 절반이 넘는 은행들이 고액권 발행에 찬성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런데도 몇조원이 들어갈지 모를 화폐단위 변경 얘기가 나오는 이유는 뭘까.

지난 5월 이헌재 부총리는 "지금은 그런 논의를 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고 했다. 경기가 나쁜데 무슨 화폐단위 변경이냐는 것이다. 그는 며칠 전 "구체적인 검토 초기 단계"라며 화폐단위 변경 가능성을 내비쳤다. 이 부총리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했을 뿐 입장이 바뀐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시중에 불안감은 여전하다. 일부에서는 화폐단위 변경이 경제적인 효과보다는 개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한국 정부의 정책에 대한 신뢰 결여가 경제 불안을 초래했다는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지적처럼 화폐단위 변경을 둔 논란이 또 다른 불안을 부를까 걱정이다.

송상훈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