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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웰빙] "사람을 모이게 하는 것은 음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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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들이 둘러앉아 송편을 빚다보니 밤이 깊었다. 이제나 저제나 떡을 안친 솥 주위를 기웃거리다가 잠결에서나 김으로 들썩이는 솥뚜껑 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조무래기들이 조물락거린 송편은 단박에 눈에 띄었다. 별.눈사람 모양 등으로 빚은 떡은 소가 비어져 나와 지저분했는데 자기 송편을 찾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런데 이젠 그런 즐거움도 아련해졌다. 떡집에서 사다 먹거나 아예 생략하기 때문이다.

궁중요리연구원에서 한복려 원장을 만났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화려한 음식으로 눈요기를 했는데 이참에 송편은 물론이고 다식이나 약식에 관한 비법 하나쯤을 배워올 요량이었다.

"효창동 옛집에 살 때였어요. 등나무가 있던 집이었는데 마당의 평상에 모여앉아 송편을 빚다 눈을 들면 마당 한복판에 걸린 둥근 보름달이 보였지요." 한 원장의 어머니는 중요무형문화재 '조선왕조 궁중 음식' 기능 보유자인 황혜성 선생이다. 한 원장은 물론이고 한복선씨와 한복진씨 등 딸 모두가 대를 이었다.

처음부터 이 일이 꿈이었을까. "수도여고를 다녔는데 이것저것 배우러 다니던 복선이와 달리 이상하게도 뭘 해봐야지라는 욕심이 없었어요." 한창 바쁜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의 맏이로서 '외상 장부'를 관리하고 동생들을 챙기면서 어머니의 일을 자연스럽게 보고 자랐다.

"어머니가 평생을 바친 일에 심취하게 됐죠. 새로운 것을 찾으면 보태고 전 고리들을 잇는 중간에 서 있어요." 1971년부터 정길자 교수와 함께 궁중 요리를 전수받았으니 올해로 꼭 34년째인데도 며칠 전 상차림을 보러 경북 안동에 다녀왔다고 한다.

방송에 출연해서는 잘 웃지 않아 스태프 중 한 명이 스마일이 그려진 종이를 흔들어댔다 하는데 사진을 찍을 때는 환하게 웃는다. 여고 시절의 모습이 드러난다. 한 원장과 이야기를 나눈 마당의 나무 식탁은 낮엔 수강생들로 붐비지만 밤이면 텅 비어 혼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갈무리하는 장소다. 황혜성 선생은 노환으로 입원 중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맏이는 알아보실 거다 생각하는데…." 얼핏 그의 눈가가 붉어진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농가에서는 추석이 일년 중 제일로 치는 명절이다. 햇곡식은 벌써 익었고, 추수철도 멀지 않았으니 이맘때처럼 마음이 풍성해지는 때도 없었을 것이다. 송편을 빚고 무를 넣은 시루떡을 쪘다. 솔잎을 넣고 찐다 해서 송편인데 솔향뿐 아니라 켜켜로 쌓아 찔 때 떡들이 들러붙는 것을 방지하는 지혜가 엿보인다. 햅쌀에 청대콩.깨.녹두.밤 등을 소로 넣으니 햇곡식의 총집합이다. 쑥과 송기.치자로 색을 낸다. 송기는 소나무의 속껍질로 봄철에 말려두었다가 삶아 치대어 쓰면 붉은 빛깔을 얻을 수 있고, 떡이 굳는 것도 늦춘다. "송편을 예쁘게 빚으면 예쁜 딸을 낳는다거나 다식판에 건강을 기원하는 문양과 글자가 들어가 있거나 우리 민족처럼 음식에 마음을 드러내는 일은 흔치 않아요. 쌈을 싸 먹는 건 복을 싸서 먹는다 하고 흰떡은 좋은 일이 길게 있으라는 뜻이죠."

모양도 지방마다 제각각이다. 크기도 어른 손바닥 반만한 것부터 한 입에 쏙 들어가는 것까지 다양하고 '달떡'이라는 이름처럼 보름달 모양 빚기도 하고, 손가락 자국이 나도록 꾹 눌러주는가 하면, 가리비 모양을 내기도 한다. 한 원장은 그 중 어느 것이 제일 낫다고 말하지 않는다. 음식을 통해 지방의 특색과 기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궁중음식을 하고 있지만 전통에 대한 그의 생각은 활짝 열려 있다.

"전통도 시대와의 타협이 필요하지요. 달라지는 입맛을 나몰라라 하고 옛맛만 고집할 수는 없어요. 전통도 미래를 지향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전통 음식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죠."

과자도 빠질 수 없다. 차례상에서 제일 먼저 손이 가던 약과며 다식이 떠오른다.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고 점심 나절에는 초여름 같은 추석에는 약과나 밤대추.다식 등을 만든다. 엿에 적셔 고물을 묻히는 유과는 정월 음식이다.

"차례는 이런 음식은 어떻게 먹게 되었나. 자연과 조상, 신에게 감사를 느끼는 시간입니다…사람을 모이게 하는 것은 음식입니다. 음식을 나누면서 정도 나누는 거죠."

궁중요리연구원의 실습실에서 고소한 기름내가 풍겨온다. "기름이 귀하던 시절, 추석만큼은 기름을 아끼지 않고 둘러 전을 부쳤죠. 토란국도 끓이고 고기도 굽고…"

아, 일년 열두 달 한가위 같기만 하여라.

하성란 소설가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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