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19금(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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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물가가 급등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이 합심하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국민이 하루 달걀 하나만 덜 먹으면 달걀 값은 떨어지게 돼 있다. 그러나 누가 사재기에 나서면 금세 값이 오르고 모든 국민이 고통 받는다. 가진 사람, 지도층부터 솔선수범해야 한다. 나부터 아끼겠다.”

당시 초등학생인 내게 전달된 대통령의 ‘말씀’은 대충 이랬다. 단어 하나하나까지 정확하진 않을 것이다. 40년 가까이 지난 기억이니 군데군데 흐려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메시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아, 나라가 어려우니 모두 아끼고 고통을 나누면 잘살 수 있다는 얘기구나’. 어찌 보면 일방적 설교였다. 그런데 말이 됐다. 어린 마음에도 와 닿았다. 같이 TV를 보던 어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이 오일쇼크를 빨리 벗어난 데는 그런 ‘합심’이 큰 역할을 했다. 다 같이 못 살던 시절, 저축이 미덕인 시대니 가능했을 것이다.

요즘은 어떨까. 지난 주말 코펜하겐 기후변화회의에서 돌아온 MB의 청와대 일성은 “너무 덥다”였다. “청와대가 20도가 넘으면 어떻게 하나. 어떤 경우에도 19도를 넘기지 마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실무진은 청와대 난방 온도를 즉시 18도로 낮췄다. 난방에 관한 한 청와대는 ‘19금(禁)’ 지역이 됐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해답으로 MB는 코펜하겐에서 ‘나부터(Me first)’를 강조했다. ‘19금’은 그 첫 실천 사례다. 박정희식 ‘솔선수범’과 ‘달걀 한 개’가 40년 세월을 건너 MB식 ‘나부터’와 ‘19금’으로 이어진 셈이다.

반응은 좀 달랐다. MB의 ‘나부터’는 국제 무대에선 큰 환영을 받았지만 국내에선 그만 못했다. ‘시늉 내기’란 비아냥도 있었다. 대통령의 솔선수범만으로 나라의 미래를 끌고 가기엔 시대가 많이 변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물러설 일은 아니다. 지구온난화는 우리 시대의 숙제다. 시대에 맞춰 더 정교하고 현실적인 방법으로 숙제를 풀어야 한다.

해법은 명백하다. 에너지 값부터 올려야 한다. 전기·가스 값이 대표적이다. 미국의 연구 결과 전기 요금을 kWh당 1센트 올릴 때마다 전력 소비가 7%씩 감소했다고 한다. 마침 청와대도 전기·가스 요금 현실화를 추진 중이다. 방향은 잘 잡았다. 그러나 2% 부족하다. MB는 “에너지 가격을 현실화하되 서민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서민’에 방점이 너무 찍히면 곤란하다. 정책이 거꾸로 갈 수 있다. 지난 정권들도 40년 가까이 ‘서민’ 핑계만 댔다. 원가보다 싸게 전기를 공급하고 적자를 세금으로 메워주는 일을 되풀이했다. 덕분에 한국전력은 매년 2조원 넘게 적자를 내고 있다. 쌓인 빚만 지난해까지 26조원이 넘는다.

싼 전기 값은 에너지 사용 구조도 크게 왜곡시켰다. 주력 난방까지 전기로 바꿔놨다. 냄새 나고 불편한 석유풍로는 퇴물이 된 지 오래다. 대신 전기난로에 온풍기가 등장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전기로 작물을 키우라고 농가에 장려할 정도다. 중유를 전기로 바꾸면 58%가 손실된다. 반면 석유를 직접 난방에 쓰면 손실은 20%에 불과하다. 이런 에너지 손실만 한 해 1조원 정도다.

게다가 전기 값이 싸면 더 이득을 보는 건 부자요, 기업이다. 예컨대 서민이 10원의 전기료를 보조금으로 받을 때 부자는 20원, 기업은 40원 이상 받는다. 주택·일반용보다 산업·농사용 요금이 훨씬 싸기 때문이다.

이런 에너지 왜곡을 잡아야 녹색 성장, 푸른 미래도 가능하다. 필요하면 요금은 올리되 일정 소득 이하 서민에겐 전기·가스 쿠폰을 나눠주는 방식도 생각해 볼 만하다. 마침 온난화가 기회다. 이번마저 놓치면 ‘19금’은커녕 ‘15금’으로도 어려울지 모른다. 물론 청와대 난방 얘기다.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