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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코드 2000] 16. '레드 콤플렉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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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며 어떤 체제도 민족에 우선할 수 없다. "

1986년 10월 정기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신민당 유성환 의원이 한 발언이다. 상식적일 것 같은 이 주장 때문에 그는 면책특권을 박탈당한 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9개월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남한 내 간첩 5만명' . 97년 2월 중순 중앙일간지들의 1면 머릿기사 제목이다. 황장엽 조선 노동당 비서가 했다는 발언이다. 끝내 근거를 대지 못한 주장이었지만 그 위력은 대단해 순식간에 공안분위기를 조성했다.

뿐만 아니다. 지난 해 초에는 저명한 정치학자인 최장집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이 "사상이 의심스럽다" 는 공격을 받은 끝에 사임했다. 한국정치학회가 "왜곡, 과장된 인신공격" 이라고 옹호하고 나섰지만 소용없었다.

한국은 반공이데올로기, 나아가 레드 콤플렉스의 나라다.

공산주의자, 즉 '빨갱이' 나 이를 용인하는 '용공분자' , 이들에 동조한 자 뿐 아니라 이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자도 불고지죄로 처벌하는 국가보안법이 이를 상징한다.

레드 콤플렉스란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과장되고 왜곡된 공포심을 말한다. 여기에는 "그 공포심을 근거로 하여 인권탄압을 정당화하거나 용인하는 사회적 심리" (강준만 전북대 교수)도 포함된다.

이 심리는 집권자가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중요한 무기가 됐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49년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반대파 세력을 침묵시키고 52년엔 야당 국회의원 50명이 국제공산당의 자금을 받았다는 '국제공산당 사건' 으로 개헌, 종신집권의 기반을 구축했다.

60년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마산시민에 대해서도 "이 난동 뒤에는 공산당이 있어 조사 중" 이라는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피리를 불면 김일성이 춤을 추고, 김일성이 북을 치면 김대중이 장단을 맞춘다" 고 선전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5.18 민중항쟁을 고정간첩들이 배후조종했다고 몰아붙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92년 대통령 선거 때 "평양방송이 야당의 김대중 후보를 당선시키라고 방송하였다" 는 평양지령설을 활용했다.

4.11 총선 당시 북한군이 판문점에서 무장시위를 한 사건도 남북 정보기관이 합의하에 연출한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그래서 97년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것은 소위 '북풍' 을 사전에 차단하는 특별팀의 활약 덕분이라는 해석까지 나오고 있다.

고려대 정외과 임혁백 교수는 "독재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침략의 위협, 내외부의 적과 그에 따른 위기감을 계속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 반공이 이용된 것" 이라고 말했다.

한국인에게 있어 레드 콤플렉스는 '빨갱이' 로 낙인찍히는 것에 대한 공포심의 발로이기도 하다. 전쟁 중 보도연맹원과 부역자의 처형, 그 친척에 대한 연좌제, 그에 따른 사찰과 공직취임 제한 등이 끼친 영향이다.

남로당 간부였던 아버지와 형들이 처형된 것을 본 소설가 이문구씨는 열 두살 나이로 "소설가가 돼야 살아남을 수 있다. 반공을 소리높이 외치는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등단해야겠다" 고 인생의 진로를 설정했다.

친척 중에 부역자가 있었다는 것은 가족 내에서도 비밀에 붙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회사원 박모(28)씨는 북한에 작은 할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됐다. 개성이 고향인 아버지가 임종 직전에 비로소 "살아계시면 76세. 일제때부터 좌익 학생운동을 하던 인텔리셨다. 이산가족 상봉기회가 있으면 찾아보라" 는 말씀을 남겼기 때문이다.

친척 중 부역자나 월북자가 있으면 공직에 취임할 수 없고 해외여행도 할 수 없는 것이 연좌제다. 신원조회 때문에 민간기업에도 취직하기 어려웠다. 한국전쟁 당시 부역자 15만3천명이 검거됐고 38만7천여명이 자수했으며 수천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80년 10월 연좌제 금지조항이 헌법에 명문화될 때까지 부역자라는 낙인은 일가친척, 특히 자손들의 사회활동을 가로막는 악령의 구실을 톡톡히 해왔다.

그러나 연좌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96년에 경기도 교육청은 초등학교 교사를 임용하면서 남편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복역 중이라는 이유로 차정원씨를 제외했다.

"보안심사 결과 남편이 '신원특이자' 라서 공무원 채용 부적격자로 판단했다" 는 게 교육청의 이유였다.

이제 북한은 '위험한 침략자' 에서 '원조 대상' 으로 전락했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의 숫자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까지 성공리에 마무리된 요즘 '반공이데올로기라는 시민종교' (강인철 한신대 사회학 교수)는 급속한 퇴조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흐름에도 암초가 숨어 있는 게 우리 사회다. 서중석 교수(성균관대 사학과)는 "냉전.분단 체제하에서 부와 지위.명성을 얻은 사람들은 이런 체제가 무너지면 기득권을 잃고 자신들이 공격대상이 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 고 지적했다.

"4.19는 부정선거가 주된 기폭제가 됐지만 국민이 자유를 회복하자 '거창.제주 학살사건의 진상을 밝혀라' '김구 암살과 이승만의 지시로 처형된 김성주 사건의 범인을 밝혀라' 는 요구에서부터 통일운동.민중운동 등이 불길 같이 일어났다.

자유라는 게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기득권 세력은 이를 바라지 않게 마련" 이라고 서교수는 말했다.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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