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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내 인생 소리에 묻고 (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1. '소리'와의 만남

때는 일제 치하인 1929년. 1년4개월 동안 다닌 대전중학교를 그만 두기로 결심한 나는 하릴없이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지금은 대전극장이 들어서 있지만 당시 허허 벌판이었던 이곳에 천막을 치고 공연 한마당이 벌어지고 있었다.

1909년 원각사가 해산된 후 개별적으로 협률사(協律社)라는 공연단체를 조직한 이들이 전국을 떠돌며 약장수 마냥 공연을 하고 다닌 것이다.

이동백.송만갑.이화중선.김추월.신금홍 등 당대 최고 명창들이었다.

전통 악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 본 적조차 없었던 나는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입장료는 학생 5전, 일반인 10전이었다. 당시 10전이면 한 상 잘 차린 밥 값이었으니 결코 싼 것이 아니었다.

용기를 내 관계자에게 다가갔다.

"저… 공연을 보고 싶은데 돈이 없거든유. " "그래□ 그러면 저쪽에 모자와 책보를 벗어놓고 이 깃발을 들고 다녀라. "

명창 이동백의 이름이 적힌 깃대를 들고 대전 시내 구석구석을 돌며 공연을 선전했다. 그렇게 한나절 돌아다니고 저녁 때가 되어서야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사과 궤짝들에 송판을 얹고 그 위에 짚과 멍석을 깐 것이 고작인 초라하기 짝이 없는 무대였지만, 객석은 구경꾼들로 꽉 차 있었다.

최승희의 스승인 한성준씨가 여자 무용수와 짝을 지어 승무를 추는 것을 시작으로 드디어 한 사람씩 나와 소리를 하는데 나는 뭔지도 몰랐지만 그저 황홀하고 눈물이 나왔다.

특히 난생 처음 보는 여자 소리꾼들은 외모도 예쁘려니와 소리도 고와 마치 선녀를 보는 듯 했다.

'나도 저런 걸 배우면 안 될까. ' 나의 소리인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1916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조부 때만 해도 우리 땅을 밟지 않고는 타고을로 갈 수 없을 정도로 너른 땅의 지주였으나 경술국치를 당하면서 일본에 몰수당해 그 생활고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4남 1녀의 장남인 나는 어릴 때부터 머리가 영특해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모았다. 그 기대에 걸맞게 진잠 보통학교 시절 전국 규모의 시험에서 충남 지역 1등을 차지해 월사금을 면제받고 대전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4백명이 넘는 학생 중 한국인은 나 혼자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인이어서 운동장에 나가면 공마냥 두들겨 맞기 일쑤였고, '조센진' '닌니쿠쿠사이(마늘냄새 나는 놈)' 라며 놀림을 당했다.

사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어린 소견에도 '졸업하면 군청 급사라도 할 수 있겠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학교에 다녀 보니까 '여기서 배워봤자 뭘 할 수 있을까' 라는 회의가 더 많았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교무실로 불쑥 들어가 학교를 안 다니겠다고 했다.

"나는 조선인입니다. 당신들은 우리 나라와 서로 약조한 게 있지 않습니까□ 소위 내선일체다, 형제의 나라다고 해놓고 우리 조선인들은 죽도록 해봤자 뭐가 될 수 있습니까?"

이런 말을 남기고 무작정 학교를 뛰쳐 나왔다. 그러나 부모를 어떻게 설득할 지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던 차에 협률사의 공연을 보고 반한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그날 밤은 남의 집 추녀 아래서 자고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소리꾼들의 숙소인 대전역 앞 중앙여관으로 찾아갔다.

나를 맞아주는 사람은 장판개씨였는데, 얼굴은 박박 얽힌 곰보였지만 소리는 무척 잘하는 분이었다. 그러나 그 분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말을 내게 해줬다.

"소리를 배우는 데는 조건이 많으니라. 우선 여기저기 이동하는데 차비가 있어야 하고 또 밥값도 가져와야 한다."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나는 그 말에 낙담했다. 소리 인생 70년에 겪은 첫 좌절이었다.

힘없이 발길을 돌렸지만 귓전에는 전날 들은 명창들의 소리가 계속 엥하고 맴돌았다.

정리〓김현정 기자

<박동진은…>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보유자, '제비 몰러 나간다'라는 광고 카피로 친숙해진 판소리 명창이다. 근세 5명창 가운데 한 사람인 정정렬을 사사한 그는 청년시절, 권번에서 기생들의 소리 선생을 하고 국극단을 따라다니는 등 고생을 많이 하다가 46세에 비로소 국립국악원 국악사 자리를 얻었다.

68년 국립국악원에서 5시간 25분 동안 '흥보가'를 완창한 것을 비롯, '춘향가' 등 수차례의 완창 판소리 공연기록을 세웠다.

73년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됐으며, 국립창극단 단장을 역임했다.

판소리 12마당 복원에도 관심이 많아 '변강쇠 타령' '숙영낭자전'등에 가사와 곡을 붙여 발표하는 한편 '이순신전' '예수전' 등 창작 판소리도 선보였다.

이런 공로로 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의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2년전부터 고향인 충남 공주시 무릉동 생가터에 세운 판소리 전수관에서 머물며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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