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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개혁 전문기자 진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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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의료마비 사태가 현실로 다가왔다. 먼저 정부와 의료계는 환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와 머리를 맞대고 대화의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한다.

초단기간에 정부주도의 밀어붙이기식 의약분업 전면 실시는 어떤 식으로든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하리란 것을 많은 사람이 예측해왔다.

의료계의 반발은 그동안 방치해왔던 의료관행에서 비롯됐다.

진료원가의 65%만 보상해 주고 나머지 손실분 35%는 비공식적인 편법 수입으로 보충해 오는 것을 묵인한 비현실적인 의료보험 수가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의사들은 비보험 진료와 약값으로 이 손실분을 충당하고 수익도 올려왔다.

30분짜리 쌍꺼풀수술 비용이 고도의 기술과 시간이 요구되는 손가락 접합술의 열배를 넘고, 유산은 환영하나 출산은 사절하는 산부인과 등 웃지 못할 파행적 의료행위가 수십년간 자행돼 온 것이다. 당연히 환자들은 의사들을 밥그릇이나 챙기는 이기적 집단으로 매도하며 불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선 약값 마진에 의존해 온 병원들은 의약분업으로 폐업을 불사할 수밖에 없다.

특히 내과.소아과.정신과.피부과.가정의학과 등 동네병원들은 의약분업 시행으로 어차피 문을 닫을 것이므로 폐업이 결코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의료계의 주장 중에 타당성 있는 부분을 선별 수용하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

사실 현 사태는 단순한 의약분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20년 이상 누적된 의료보험제도 문제, 취약한 공공의료에 대한 정부지원 부족 등에서 불거져 나온 일부에 불과하다.

따라서 근본적인 해결은 국민보건의 근간인 '의료계 구조조정' 을 위해 정부가 얼마의 예산을, 어떻게 유용하게 투입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부와 의료계는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에 걸맞은 의료비 재편의 시대가 왔음을 인정하고 상호 협조 아래 국민복지의 근간인 의료개혁을 주도해야 한다.

의약분업의 기본취지가 아무리 좋더라도 산적한 의료계 문제점을 안고 원만히 해결될 수 없다.

의약분업은 분명 우리나라 의료수준을 한단계 높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선진국식의 제대로 된 의약분업이 되려면 의사의 진료행위와 약사의 조제료에 대한 파격적 인상이 불가피하며 이를 위해 4조원 가량이 필요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금융구조정비를 위해 수십조원씩 퍼붓는 마당에 의료계 구조조정을 위해선 이 정도 비용은 필연적이라는 주장이다.

과연 이 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현재 우리나라는 소득의 3%를 의료비로 지출한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경제수준.의료혜택을 받는 OECD국가들의 경우 의료비 부담이 소득의 8~20%선이다.

의료보험사업 시행 초기에 정책 입안자들이 속전속결로 제도를 정착시키려다 보니 필요한 금액보다 낮게 추징한 탓이다.

하지만 국민을 어떻게 설득시켜 의료비 부담률을 단시일 안에 OECD국가들 수준으로 현실화할 것인가.

원론적인 비현실적 주장 대신 이제는 정부와 의료계가 솔직해질 때다.

국민소득 1천달러 시대에 만들어진 의료보험의 근간을 1만달러 시대에 맞게 변화시키는 구체적인 방법을 논의해야 한다.

의료는 공공의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에 시장경제 원리에만 맡길 수는 없다. 이런 시각에서 우리나라 의료서비스 제공자의 80%가 개인이라는 점은 심각한 문제다.

적절한 규제와 전국민에게 기본진료 보장이라는 명제를 실현하려면 이제라도 공공의료를 대폭 확충해야 한다.

만일 의료서비스 제공자의 80%가 공공의료부문이었다면 집단폐업을 하더라도 현재와 같은 의료대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개인이 투자한 병의원.약국을 규제 일변도만으로 나갈 수는 없다. 경쟁을 유도하는 시장원리를 원천봉쇄할 땐 파행적 의료행위가 더욱 더 강화될 것이며 최대 피해자는 결국 소비자가 될 것이다.

정부는 미봉책 대신 공공의료 확충 등 의료계 구조조정을 위한 재정확충방안 등 현실적인 비전을 제시하면서 일부 개인 투자 의료기관에는 시장원리를 도입해야 할 것이다.

의료계도 정부에만 책임을 돌리지 말고 환자들과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의료혜택을 누리는 것은 인간의 기본권이며 이를 해결해 주는 것은 정부와 의료계의 공동책임이다.

황세희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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