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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일본·독일인은 게으름쟁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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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일본과 독일은 비록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긴 했지만 짧은 기간에 경제를 되살리고 발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한동안 '라인강의 기적' 또는 '떠오르는 태양'이라는 찬사를 받아 왔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자 양대 경제는 함께 장기침체에 빠져들고 만다. 저성장 고실업 현상이 계속되면서 이제는 '독일병'과 '일본병(nipponesis)'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일본 지바대의 데즈카 가즈아키(手塚和彰)교수는 올해 봄에 펴낸 '게으름보 일본인과 독일인'이란 저서에서 두 나라 경제가 이렇게 주저앉게 된 원인의 하나로 양 국민의 근면성이 사라졌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일벌레 소리를 들을 만큼 열심히 일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게을러졌다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병을 핑계로 직장을 쉬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났다고 한다. 뮌헨에 있는 유럽 최대의 자연공원 '잉글리시 가든'에는 평일에도 많은 젊은이가 일없이 배회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게으름쟁이들이 늘어났으며, 특히 학교 졸업 후 정규직 대신 아르바이트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프리타' 들의 숫자가 크게 증가했다.

왜 사람들이 게을러졌을까? 데즈카 교수와 또 다른 학자들이 주장하는 이유는 첫째, 복지제도가 잘 돼 있어 열심히 일할 유인이 없다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근로자가 병가로 쉬게 되면 6주간은 회사에서 임금을 그대로 주었고 7주째부터는 건강보험 측에서 계속 지불해 왔는데 연간 제한이 없었다고 한다. 이런 식이라면 국민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조자립의 정신을 발휘하기보다 정부의 도움에 의지하게 되는 법이다.

둘째, 국민이 성취감에서 목표와 방향을 잃고 정신적으로 해이해졌다는 점이다. 전쟁에 진 두 나라 국민에게는 경제복구가 최우선 목표여서 한눈 팔 새가 없었다. 특히 분단국 독일은 장차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 국민이 더욱 부지런히 일했다. 그러나 일단 미국을 제외한 여타 선진국들을 다 따라잡고 나자, 그리고 독일의 경우 대망의 통일까지 이루고 나자 국민이 긴장을 풀고 나태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셋째, 교육제도에 정부가 지나치게 간여해 표준화를 도모함으로써 학생들의 창의성과 학력을 저하시키는 한편 국민의 정부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부작용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두 나라의 경험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의 역할이 지나치게 커져 국민을 게으르게, 그리고 정부에 너무 의존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저소득층의 복지 확충 등 누가 봐도 필요하고 바람직한 제도들은 시행해 가야겠지만 그 밖의 선진국형 복지제도 도입은 우리 형편에 맞추어 추진돼야 한다. 유럽 모델을 좇아가다가 소위 '복지거품'을 만들어내게 되면 근로자의 기강은 해이해지고 경제 침체와 재정파탄을 초래하게 돼 다음 세대에 엄청난 부담을 지우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아울러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일본과 독일 두 나라는 80년대에 이미 경제강국으로 부상했고 통일까지도 달성했으니 지금 정도의 게으름은 용인될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아직 1인당 국민소득이 1만달러 수준인 데다 남북이 나누어져 대치해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주변에는 강대국들이 포진해 있어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국가 운명과 관련된 중요한 일들이 처리될 수도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도 긴장이 풀려 정치인이나 국민이 경제재건을 위한 일은 뒷전으로 밀어두고 이념이다, 수도 이전이다, 과거사다 해서 편을 갈라 싸우는 데만 열중한다면 국가경제의 앞날은 불을 보듯 뻔할 것이다.

노성태 논설위원